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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의 아들!

사진아래 맨왼쪽 안중근의사의 2남 안준생
사진아래 맨왼쪽 안중근의사의 2남 안준생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 아들이 친일파로 살았던 이유

황해도 해주에서 안중근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기 때문에 아버지를 잘 알지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후 어머니를 따라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다가 상하이 조계에 거주하며 항저우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1939년에는 상하이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중 내선일체 활동의 일환으로 상해 체류 조선인의 '만선시찰단'(満鮮視察団)에 참가하여 일행은 동년 10월 9일에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과 면담하였다.

10월 11일 평양에서 해산한 뒤 그는 몇 명의 수행자와 10월 15일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지금의 서울 신라호텔 근처)을 찾아 이토의 위패에 대해 분향하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부친 안중근의 추선 공양도 같은 절에서 행하였다.

또한 10월 16일에는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아들인 이토 분키치 남작(귀족의원, 일본광업사장)와 면회하여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며 사죄하였다.

10월 17일 안준생과 이토 남작, 나카무라(中村)라는 여성등 3명이 박문사에서 합동참배를 하였다.

암살자와 피해자가 그 쌍방의 자손에 의해 동시에 공양을 받는 것으로, 내선융화(内鮮融和) 이벤트는 차질없이 완료되었다.

한마디로 제국 정부의 치밀한 각본대로 연출된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라며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준생이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후에 일본은 영국인 세관장이 살던 고급 주택을 사주는 등 준생을 특별 관리했다.

이 이야기를 신문에서 알게 된 한국독립운동가 김구는 안준생이 미나미 총독을 아버지라 불렀다며 '민족반역자(매국노, 韓奸)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

당시 충칭에 있는 장제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화민국 당국은 그 요청을 무시하였다.

안준생은 이후로도 살해되지는 않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잠시 귀국을 망설이다가, 1946년 모친 사후, 간신히 귀국하였다.

귀국 후 남한에 숨어살다가 한국전쟁 중 1951년 부산으로 피신해 있을 때 덴마크 국적의 병원 선내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현재 서울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다.

부인 정옥녀씨와 1남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안준생의 아들 안웅호(安雄浩)는 미국에서 중국계 여성과 혼인하였으며 미국에서 의사로서 심장병 권위자가 되었다.

안웅호의 아들 토니안 주니어는 한국어를 못하는 재미한인으로 의거 104주년 기념하여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안준생은 친일파로 비판을 자주 받아 후세에 의한 변호와 비판이 양립되는 중이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을 맞아 국내 학계, 언론이 다각도로 재조명되고 있다.

연합뉴스’가 ‘안중근 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2009년 11월 1일자)이라는 제목으로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 의사가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친일파로서의 삶

안중근 의사는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그 당시 안중근의 아들 안중생은 겨우 4살에 불과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안중생은 어머니와 함께 힘든 생활을 이어갔고, 그의 인생은 출발부터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아버지 안중근이 일본에 의해 처형되면서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아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안중생은 성장하면서 조국의 독립운동이 가야 할 길을 고민했지만, 그의 환경은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데 장애물이 많았다 아버지의 명성은 그에게 무거운 짐이었고,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부터 일제의 감시 아래 있었던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안중생의 선택이 본격적으로 조국을 배신했다고 평가받게 된 계기는 1930년대 이후의 행적에서 비롯된다 그는 성인이 되어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고, 그곳에서 일제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된다 일본은 안중생을 통해 안중근의 후손이 일본에 협력한다는 이미지를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 일본은 안중생에게 많은 유혹을 던지며 그를 회유했다 특히, 일본의 제국주의적 교육을 받은 안중생은 점차 조국의 독립에 대한 이상보다는 자신의 생존과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살아가며 일본의 체제에 적응해야 했던 그는 결국 일본 제국의 체제에 협력하게 된다 이는 아버지 안중근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고, 조선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안중생은 일본 제국의 통치 아래 여러 기관에서 일하며, 조선인 동포들에게 적대적인 모습도 보였다 특히 그는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고 협력하는 위치에 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이는 아버지가 목숨 바쳐 싸웠던 그 일본에 그가 협력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안중생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 이유를 단순히 개인의 야망이나 배신으로만 보기에는 안중생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고 많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잃고, 일본의 탄압 속에서 살아가며 그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협력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조선인들이 생존을 위해 일제에 협력해야 했던 현실을 감안하면, 그도 그들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또한, 안중생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늘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었고,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자신의 삶을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가기에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괴감, 그리고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그는 어쩌면 도망칠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생의 선택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의 협력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저버린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특히나 그의 아버지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더 큰 배신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해방 이후, 안중생은 친일파로 분류되며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을 맞이했을 때, 그는 아버지 안중근과 같은 위대한 인물의 후손으로 인정받기는커녕 친일 행적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그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고, 조선 사회에서 그의 이름은 점차 잊혀져 갔다 그의 삶은 어둠과 후회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남긴 위대한 업적을 잇지 못한 죄책감, 그리고 일제에 협력함으로써 민족에게 등을 돌린 선택은 안중생에게 평생의 짐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고,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삶을 비극적인 선택의 연속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안중근의 유산을 이어가기에 너무나도 큰 압박을 받았고, 생존과 체제에 대한 협력을 선택함으로써 조국을 배신한 인물로 남았다 이는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신념과 생존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도 있었고, 체제에 협력하며 살아남은 이도 있었다 안중생의 삶은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민족에게 등을 돌린 채 살아가야 했던 가슴 아픈 현실을 증명한다 안중생의 선택은 그를 비난받게 만들었지만, 그 역시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점을 함께 기억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중 가장 존경받는 이가 있다면 단연하건대 안중근 의사인데 하지만 그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었으니, 바로 안중근의 둘째 아들 안준생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는 당시 조선총독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4발의 총탄을 쏜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적중한 3발은 그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저격을 두고 국가를 위한 행동이란 것은 인정하지만 그 이후 과정에 대해 갑론을박이 의외로 많다.

안중근 의사의 행동으로 합일 합병이 빨라졌고, 일제 식민통치하에 수탈이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 정책을 편 온건파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 그가 저격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거세게 몰아붙인 것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암살이 성공했던 실패했던 한국은 결국 합병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 정책을 폈던 가장 큰 이유가 그가 주장한 “내선일체” (일본과 조선은 한 몸)임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급진파보다 더욱 위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저격 사건 이후 결국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불과 5개월 만에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맞게 된다.

그로부터 5개월 뒤 한국은 결국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안중근 의사는 역사 속으로 그 이름을 남긴 채 사라졌지만, 그의 가족은 현실 속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과연 일제의 가장 큰 치욕을 남겼던 인물의 가족은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사실 안중근 의사는 의거 직전 친구를 통해 가족에게 서신 한 통을 보냈다.

연해주에 거처를 마련했고 그곳으로 지금 당장 출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서신을 받자마자 안중근의 가족은 연해주로 출발하였다.

야반도주하듯 떠나온 길이었지만 무사히 도착한 그곳에서의 삶 역시 안중근 가족에게 꽃길이 되지는 못하였다.

불안 속에 삶을 연명하던 안중근의 가족은 1년 만에 누군가 알 수 없는 이가 준 과자를 먹은 당시 7살이었던 장남 “안분도”를 잃고 만다.

이 사건 이후 가족은 안중근 의사가 마련해둔 거처를 버리고 연해주 및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서야 그 부름을 받아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김구 및 임시정부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자신들의 가족처럼 돌보고 보호했고 차남 “안준생”은 지원을 받아 가톨릭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등 당시로써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잠시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에 테러집단으로 지명받게 되었고, 이에 임시정부 역시 상해를 떠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안중근의 가족은 상해에 남겨지고 말았다.

일본은 사라진 임시정부 대신 안중근 가족을 붙잡았고 이때부터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온갖 탄압 속에 하루하루 생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특히 장남이 죽고 난 뒤 가장이 된 차남 안준생은 경계대상 1호였다.

안준생이 장성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면 일본 군인들이 들이닥쳐 훼방을 놓았다.

결국, 서른 살까지 안준생은 번듯한 직장조차 없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하루를 버티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역사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그러나 보잘것없는 삶을 살던 그에게 악마의 속삭임이 들렸다.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총독은 안준생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한다.

서울 박문사 라는 절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참여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과하라, 그렇게만 해준다면 지나온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겠다.

그것은 사실상 회유라기보단 협박에 가까웠다.

이를 거절한다면 안중근의 일가족은 간신히 붙잡고 있는 목숨까지도 위협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안준생은 이렇게 말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

아버지는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영웅처럼 살 수 없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도 없다.

결국,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두 아들이 만났다.

이토 히로쿠니는 거만하게 안준생에게 한 손을 내밀었고 안준생이 그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고개를 숙이자 박문사에 있던 조선인과 일본인의 탄식과 환호가 동시에 들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시 “박문사 눈물의 화해”라는 기사들이 일본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다음날 일본 전역에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자식이 애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라고 소식을 전했고 안준생은 민족의 영웅 아버지를 둔 민족의 배신자 아들이 되어버렸다.

그 뒤 안준생은 미나미 총독의 양자로 들어가 이토 히로쿠니와 일본 전역을 마치 개처럼 끌려다니며 일명 “눈물의 화해”를 재현하고 또 재현한다.

당시 조선사람들은 그런 안준생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호랑이 아비에 개자식”이라 욕하고 침을 뱉었다.

심지어 김구 선생께서는 해방이 되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응징해야 할 인물로 안준생을 꼽았다.

그렇게 한국 및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한 안준생은 막대한 상금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와 가정을 꾸렸다.

그를 안아주던 건 그의 어머니이자 안중근 의사의 아내 “김아려”뿐이었다.

그렇게 안준생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고, 일본의 패망 이후 가족들을 전부 미국으로 보낸 뒤 혼자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야기에 따르면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를 민족의 배신자라고 여긴 의사들이 모두 진료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귀국 후 1년도 되지 않아 쓸쓸히 조국에서 그의 생을 마감한다.

안준생 어록 중 :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고.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지만, 가족에겐 영웅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순 없을 것이다.

그 시간, 그 순간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겪었을 갈등과 번뇌를 모두 이해할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아버지의 업적을 망쳐버린 걸 떠나 그의 선택 자체가 옹호 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말처럼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제2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대한민국이 더이상 굴욕의 역사를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역사 속 숨겨진 사실을 끄집어보았다.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된다. 우리는 값비싼 교훈을 역사로부터 배웠고 이제 되풀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안준생이 친일 행보를 보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생존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조선에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감시를 받았으며,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안준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와 다르게 살고 싶지 않느냐?"

"우리와 협력하면 가족도 안전하고, 너도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온 안준생은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

그의 선택은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1939년 10월 16일, 안준생은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조선호텔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다

"아버지께서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광경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경성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일본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안중근의 아들도 일본을 존경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그는 조선 내에서도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1945년 광복 후, 안준생은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가 일본을 위해 충성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조선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중국으로 떠나 숨어 지내다가, 1949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국도 역시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지는 않았다

"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그는 친일파로 낙인찍혀 고향인 황해도로 가지 못했고,

부산으로 내려와 외롭게 살았다

1951년 4월 30일,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부산의 허름한 여관에서,

그는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조차 없었다

결국 한 시민이 그를 불쌍히 여겨 장례를 치러주었고,

그의 무덤은 이름도 없이 조용히 묻혔다

안준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안준생은 영웅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존을 위해 친일이라는 길을 선택했고, 결국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그를 단순한 '매국노'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희생자로 바라볼 것인가?

역사는 냉정하지만, 인간의 선택은 복잡하다

안준생의 삶을 통해 우리는 단순한 흑백논리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기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 집안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명문가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이 넘고, 독립유공자 훈장을 탄 사람도 10명이 넘는다.

안 의사의 업적과 가문이 빛난 만큼 가족의 어려움은 컸다. 그림자도 짙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받았던 동생인 정근과 공근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근은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내무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된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1949년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근의 차녀 미생은 백범 김구 주석의 큰아들 인과 결혼했다.

인은 광복 5개월 전 폐병으로 사망했다.

미생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집안과 연락이 끊겼다.

안 의사의 막내 동생 공근은 김구 주석의 최측근이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선서를 하고 사진을 찍은 곳이 공근의 집이었다.

1933년에는 김구 주석과 함께 장제스 국민당 총통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1939년 백범의 신임을 잃은 직후 충칭에서 행방불명됐다.

안 의사와 마찬가지로 정근과 공근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광복 후에도 안 의사 집안은 가난과 탄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정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김구 선생 계열에서 활동하던 안 의사 집안은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되고 박해받았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 경근씨는 ‘민주구국동지회’에서 활동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7년간 투옥됐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통일운동을 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민생씨는 중국 옌지에 있는 사촌 동생 경옥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다.

안 의사 직계 가족들의 과거는 더 아프고 어두웠다.

안 의사 가족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코르지포, 중국 길림성 무링(목릉)현, 러시아 니톨리스크, 중국 상하이 등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안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1946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숨졌다.

안 의사가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큰아들 분도는 1911년 지린성 무림현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일본 밀정에게 독살됐다는 설이 제기됐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사는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안중근의 2남 안준생,먹고살기위해,생존을 위해,마지못해,할 수없이 친일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안중생, 무작정 그에게 돌을 던지기에는 복잡한 삶이 함께 있었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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