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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과 공녀의 역사
기황후의 권력과 공녀와 조공의 역사, 고려에서 일제강점기전까지 끊이지 않은 굴곡의 여정"
기황후(奇皇后)는 고려의 기철(奇轍)과 기주(奇柱)의 동생으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제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원나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가문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기황후가 고국인 고려에 더 많은 조공을 요구한 배경에는 원나라의 국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목적과 함께 고려 내부의 세력 다툼이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기황후가 원나라 황후가 된 이후 그녀의 두 오빠 기철과 기주는 고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기철은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며 탐욕과 횡포를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이에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은 원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친원 세력을 제거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결국 기철과 그의 형제들은 공민왕의 명에 의해 제거되었으며 이 사건은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이에 기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에 더욱 많은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이를 통해 원나라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고려에 큰 경제적 부담을 주었고 민생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기황후는 고려의 불복과 저항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해 직접 고려를 침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침략 시도는 고려 장군 최영(崔瑩)과 이성계같은 뛰어난 지휘관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방어되었습니다.
최영 장군은 지략과 용맹으로 원나라 군대의 침략을 막아내며 고려의 자주성을 지켰습니다.
기황후의 침략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는 원나라의 세력 약화와 고려의 점진적인 독립 강화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결국 원나라의 몰락과 함께 기황후의 영향력도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조공과 공녀의 역사적 배경 고려 시대의 조공과 공녀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는 외교 정책을 통해 국익을 도모했습니다.
특히 송나라, 거란(요나라), 금나라, 그리고 원나라 등과의 외교에서 조공과 공녀 제도는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조공: 고려는 주변 국가에 다양한 공물(금, 은, 비단, 특산물 등)을 바쳤습니다.
이를 통해 군사적 위협을 줄이고 외교적 안정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공녀: 원나라 시기 공녀 제도는 가장 가혹한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
고려의 미모와 지혜를 갖춘 여성들이 원나라로 강제 징발되어 황실과 귀족들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조공과 공녀 조선 왕조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외교를 유지했습니다.
명나라와의 관계:
명나라는 조선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 대신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에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쳤으며, 공녀는 명나라로 보내지 않았지만 왕실 여인들의 결혼 문제를 외교적으로 이용한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청나라와의 관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굴욕적인 조공과 인질 제공을 강요받았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정기적인 조공을 바치며 청나라의 신하국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조공 19세기 말 조선은 서구 열강의 침탈 속에서 외교적 고립을 겪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외교적 압박을 가하며 조공과 비슷한 경제적 수탈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에 완전히 병합되기까지 이어졌습니다.
해외 사례 중국의 조공 체제: 중국은 한나라 이래로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조공 체제를 강요하며 중화질서를 구축했습니다.
이는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주변국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유럽의 공물 제도:
중세 유럽에서도 조공과 유사한 개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성로마제국 내 소국들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쳤으며, 이는 충성과 안보를 보장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바치세: 오스만 제국은 정복지와 속국들에게 공물과 인질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군사적 통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공과 공녀 제도는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상징합니다.
특히 동아시아 역사에서 이는 외교와 정치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나, 약소국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기황후의 사례는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조공과 공녀 제도를 통해 외교를 유지했던 역사는 오늘날에도 교훈이 될 수 있으며, 국가 간 외교의 평등성과 상호 존중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약소국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기황후의 사례는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조공과 공녀 제도를 통해 외교를 유지했던 역사는 오늘날에도 교훈이 될 수 있으며, 국가 간 외교의 평등성과 상호 존중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조공제도와 동아시아 외교질서의 이해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외교적 형식입니다
조공은 중국 주변 국가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는 행위로, 이러한 관계는 중국의 고대 주나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이 본격적으로 주변 국가들에게 적용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며, 당나라 시기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 잡았습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까지 이 제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조공과 책봉의 형식은 중국 주변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고,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종속국으로 거느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단순히 형식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며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중국과 교역할 때도 조공 무역의 형태를 띠었지만, 이를 통해 유럽 국가들이 중국의 속국으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는 제국주의 시대에 중국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조공은 단순한 외교적 의례가 아니라 국제 무역의 중요한 형태였습니다
중국은 조공을 바치는 국가에게 그 몇 배의 하사품을 내려주었고, 이를 통해 중국과 주변국 간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주변국은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공과 책봉을 선택했으며, 이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조공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규모 무역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습니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에 통상 요구를 할 때도 조공 무역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던 이유는 청나라가 조공 외의 무역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공과 책봉 관계는 한나라 이후 19세기까지 중국의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었습니다
만주, 몽고, 서장, 안남 및 중앙아시아 등 모든 주변국은 중국에 조공을 하게 되었으며 전근대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조공과 책봉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 간의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조공과 책봉만으로 한국이 중국에 예속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조공과 하사품 외에 사무역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으로부터 황이나 말 등을 수입하여 조공을 계기로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을 일본이나 여진에 수출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 큰 경제적 이익을 남겼습니다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명이 청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이 중국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나타냅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오랜 관계와 임진왜란 때의 지원으로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가 만주족의 나라로 조선에게 오랑캐로 불리던 국가였기에, 조선은 청과의 조공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정치적으로는 조공 책봉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청을 비롯한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는 우월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조선의 문화적 자긍심을 나타내며, 19세기와 20세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은 중국이라는 강대국과 수천 년간 국경을 맞대면서 독자적인 국가를 지켜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공과 책봉은 한국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하지만, 형식적인 면만을 보고 한국이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한국의 독립성을 지켜온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조공제도는 단순한 외교적 형식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복잡한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조공과 책봉의 관계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측면에서 서로 얽혀 있으며,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공제도의 기원과 발전 과정은 동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중국과 주변 국가 간의 외교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다음은 조공제도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 기원 주나라 시대:
조공제도의 기원은 중국 고대 주나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에는 귀족들 간의 관계에서 조공의 개념이 나타났습니다.
주나라의 왕은 주변의 제후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습니다.
2. 한나라 시기 조공의 확장:
한나라(기원전 206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 시기에 들어서면서 조공제도가 주변 국가들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한나라가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조공을 통한 외교적 접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3. 당나라 시기 정착과 제도화:
당나라(618년부터 907년까지) 시기에 조공제도는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국제질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공과 책봉의 관계가 더욱 정교해지고, 주변 국가들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형식이 확립되었습니다.
당나라는 조공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강화하고, 문화적 교류를 촉진했습니다.
4.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지속적인 유지:
명나라(1368년부터 1644년까지)와 청나라(1644년부터 1912년까지) 시기에도 조공제도는 계속해서 유지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공을 바치는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하사품을 받으며, 이를 통해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조공제도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5. 19세기 이후 변화와 도전: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시작되면서 조공제도는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유럽 국가들이 중국과의 무역을 요구할 때 조공 무역의 형식을 갖추어야 했고, 이는 청나라가 조공 외의 무역 형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조공제도의 형식적 측면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조공제도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중국과 주변 국가 간의 외교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였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유지되었으며, 동아시아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초기 중국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에 상나라를 정복하고 세운 왕조로, 봉건제를 통해 제후국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주나라 왕은 제후국들로부터 충성과 조공을 받으며 중앙집권적 통치를 유지했습니다.
주나라의 통치 아래, 여러 제후국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 제후국은 각기 다른 지역에 위치하며, 자치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나라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주요 제후국으로는 다음과 같은 국가들이 있습니다
: 진(秦): 후에 진나라로 발전하여 통일 제국을 형성. 초(楚):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제후국으로, 후에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 위(魏), 한(韓), 조(趙): 이들 국가는 후에 삼국시대의 형성에 기여. 조공제도의 배경 정치적 안정: 조공제도는 주나라 왕과 제후국 간의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제후국들은 조공을 통해 왕의 보호를 받고, 왕은 제후국의 충성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습니다.
경제적 교류: 조공은 경제적 교류의 일환으로, 제후국들은 자국의 특산물을 바쳐 왕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왕은 이를 통해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적 교류: 조공제도는 문화적 교류의 기회도 제공하였습니다. 제후국들은 조공을 통해 왕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왕은 제후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공제도는 이러한 초기 국가들 간의 관계를 통해 발전하였으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와 외교적 관행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조공제도의 초기 형태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변천을 겪었습니다.
초기에는 주나라와 제후국 간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조공제도의 변천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초기 조공제도의 형성 주나라 시대: 초기 조공제도는 주나라 왕과 제후국 간의 봉건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제후국들은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왕은 그 대가로 군사적 보호와 정치적 지위를 보장받았습니다.
제후국의 독립성 증가 춘추전국 시대: 기원전 770년경부터 시작된 춘추전국 시대에는 제후국들이 점차 독립성을 강화하고, 왕의 권위가 약화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조공의 성격이 변하여, 제후국들은 왕에게 조공을 바치기보다는 서로 간의 세력 다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중앙집권적 조공제도의 발전 진나라 통일: 기원전 221년에 진나라가 통일을 이루면서 조공제도는 중앙집권적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통해 조공제도를 재편성하고, 주변 국가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한나라와의 관계 한나라 시대: 한나라(기원전 206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에서는 조공제도가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한나라는 주변 국가들에 대해 조공을 요구하고, 이를 통해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며,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조공제도를 활용했습니다.
송나라와 명나라의 조공제도 송나라와 명나라: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에는 조공제도가 외교적 수단으로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공을 바치는 국가들이 중국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조공을 통해 외교적 지위를 확보하고,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근대화와 조공제도의 변화 근대 이후: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과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조공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조공의 개념이 약화되고, 강대국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로 인해 전통적인 조공제도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었습니다. 조공제도는 초기의 봉건적 관계에서 시작하여, 중앙집권적 외교 수단으로 발전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변화하는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천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와 외교적 관행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이 중국에 조공을 바친 마지막 시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왕조(1392년부터 1910년까지) 시기 동안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조공의 마지막 시기 청나라 시기: 조선은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조공을 바치는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고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갑신정변(1884년): 19세기 후반, 조선은 내부적으로 개혁을 시도하며 외세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조공의 성격이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 강점기(1910년):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조공 제도는 사실상 종료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중국과의 전통적인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친 마지막 시기는 19세기 말, 특히 청나라의 지배 하에 있었던 시기로 볼 수 있으며, 공식적으로는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조공 제도가 종료되었습니다.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친 역사는 한국과 중국 간의 복잡한 외교 관계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조공 제도는 단순한 외교적 의례를 넘어,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이러한 전통은 사라졌지만,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는 여전히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구한말, 한국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시기 조공의 양과 빈도, 그리고 여성 송환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공의 양과 빈도 조공의 빈도: 구한말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습니다. 조공의 내용은 주로 쌀, 면포, 금속 제품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조공의 양은 상황에 따라 달라졌지만, 대체로 상당한 양이었습니다 .
여성 송환: 조공의 일환으로 여성들이 청나라에 송환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귀족이나 고위층의 자녀로, 정치적 결혼을 통해 외교적 관계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구체적인 숫자는 명확하지 않지만, 매년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여성이 송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의 국력과 외교적 상황 국력의 약화: 구한말 한국은 외세의 압박과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공은 외교적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여겨졌습니다.
외교적 의례: 조공은 단순한 물질적 교환이 아니라, 외교적 의례로서의 의미가 컸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중국으로 간 여인들 공녀!
공녀란 공물의 일종으로서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조공의 하나로 여자를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 고구려나 신라가 조공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조공이 하나의 국가적인 연례행사로 자리잡은것은 고려시대인 1221년부터 조선전기까지 라고 할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보통 세종을 띄우는데 촛점이 맞혀져 있어서 조선 세종때에 들어서 조공이 중단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세종 역시도 즉위 초기에 많은 수의 공녀를 명나라에 보낸것이 사실입니다
공녀조공이라는 제도를 우리조상들이 본격적으로 따르게 된것은 중국 원나라때부터이고 원나라를 이어서 중국대륙에 집권한 명나라때도 계속 이어집니다 정확히 중국이 우리에게 조공요구를 멈추게 된것은 임진왜란 이후입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명 , 그리고 일본 세나라 모두에게 굉장히 큰 사건이였는데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해져서 공녀나 조공을 받칠 여력이 없었고 명나라 역시 임진왜란 이후 급격한 쇄퇴기를 맞게 되면서 명나라 초기와는 반대로 공녀를 요구할 정도의 뻔뻔함을 보일만큼 국력이 쎄지 못했습니다 자국내의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대륙에 청나라라는 새로운 제국이들어서면서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공녀제도가 다시 부활합니다 고려시대때 기록된 공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말 고려사절요에 있습니다
1274년 고려사 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원나라에서는 원나라 군인들의 아내가 될 고려여인들을 요구하였고 이에 여인 140명을 뽑아 보냈는데 여인들이 떠난후 길에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같은해에는 제1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있었습니다
원나라는 젊은 고려의 남성들은 일본침공을 위해서 병사로 징집했고 여성들은 공녀로 보내졌던 것입니다
고려사에 기록된 원나라의 공녀요구는 총 80년간 50여회이지만, 공식기록 이외의 것을 합하면 수 천명의 고려여인들이 인간공물인 공녀가 되어 고향을 떠나 원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고려에서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서 원나라에 조공할 공녀의 숫자들을 채워넣었다고 합니다
또 기황후와 같이 권문세족의 높은 지위를 가진 집의 규수들도 포함되었는데 고려후기 학자 이곡의 1335년 상소문에 따르면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들이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끝나지 않는다고 했고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고 고려사절요 25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공녀에 대한 기록 태조 이성계때는 없었지만 태종 이방원때부터 생기는데 1408년 태종 8년 공녀를 선발했다고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공녀의 조건을 보면 13세부터 16세까지의 처녀 미모를 갖춘 양갓집 규수였다고 합니다
1408년의 공녀 선발은 조선 백성들을 두달동안이나 공포에 떨게 한걸로 유명합니다
태종은 전국 각 도에 관찰사를 보내 총 30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의정부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정부에서는 2차 심사를 실시하는데 부모상을 당한 자나 무남독녀는 제외되어 총 7명만 선별되었습니다
이 7명은 경복궁으로 보내져 명나라 사신에게 최종심사를 받았습니다
후보가 된 여인들은 몸이 아픈척을 하거나 얼굴을 바늘로 긁거나 약을 발러 상하게 하는 방법으로 탈락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서 이 7명의 공녀후보들은 명에 가지 않으려 했고 결국 명나라의 사신은 이들을 모두 퇴짜놓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처녀사냥은 시작됐으며 수령 품관 향리 양반등 모든 백성들의 집들을 수색하여 미모를 갖춘 처녀들을 색출하기 시작했고 부모와 가족들은 딸을 숨기려하고 관리들은 처녀를 색출하려고 하니 쫓고 쫓기는 난리가 계속 되었고 딸을 어린나이에 시집보내거나 비구니로 만드는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딸을 숨기려 하거나 흉하게 보이려고 한 부모들은 전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그걸 빌미로 일부 조선의 관리들은 양민들의 재산을 뺏었습니다 당시 태종에게 올라온 상소에 따르면 관리들이 부녀자들을 잡아가두고 매질을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크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공녀조공과 세종대왕 태종이방원때 백성들이 꾀를 부리거나 편법을 이용하여 공녀로 선발되는걸 피하려고 하는경우들이 많아지자 세종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법률을 만듭니다
그 첫번째 법이, 신고제 입니다
신고제란 딸을 가진 모든 전현직 관리들이 자진 신고하는 제도인데 신고하지않으면 적발시 전 재산이 몰수 되었고 이를 신고한 자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법령은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 넣었고 서로를 불신하게 됐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평소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복수할 기회라고 여기고 딸이 없는 사람을 딸이 있다고 거짓 신고해서 재산을 뺏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세종은 딸을 숨기는 가정이 있는 지역의 수령들 역시 연대 책임을 지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딸을 조혼시켜 공녀징집을 피하려는 백성들이 있었고 세종은 12세 미만 (공녀선발 연령 13세 이상)의 조혼을 전국적으로 금지시킵니다
사실 세종대왕의 당시 통치키워드는 지극정성으로 중국을 사대 하자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황제가 죽었을때 사흘만 입어도 되는 상복을 27일간 입었다던가 명나라의 요구에 응해 말 3만마리를 조공으로 보냈고 명나라에 농업용으로 소 1만마리를 보냈다는 등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세종의 이런 명에 대한 사대는 훗날 훈민정음을 반포하기위한 고도의 외교술로서 오히려 세종을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세종은 수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명주 인삼 해동청(매)의 조공을 더 하는 조건으로 공녀조공을 면제해달라고 요구했고 명으로부터 이를 승인받습니다
두명의 자매가 모두 공녀로 간 한씨자매 이야기 태종과 세종때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한확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누이동생들은 한양에서도 미모가 뛰어난것으로 유명했는데 태종때 첫째 누이를 명에 공녀로 보내면서 우의정으로 승진했고 세종때에는 둘째 누이를 명에 보내 영의정으로 승진을 하게 됩니다
한확이 간통을 저질렀을때에도 세종은 한확의 누이들이 희생한것을 알았기에 내가 죄를 줄수 없는사람이라면서 그의 죄를 면제해줬습니다
그의 첫째 누이는 중국어가 능통했고 미모와 지성이 뛰어나서 영락제의 이쁨을 받았지만 공녀로 온지 3년만에 영락제가 죽게되자 순장됩니다 ( 중국의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도 같이 죽는 풍습) , 그리하여 20살의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을 메 자결을 하고 순장되는 비참한 운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521년 조선 중종 16년에는 중국이 요구하는 숫자만큼의 공녀를 준비해 뒀지만 당시 중국의 항제 정덕제가 갑작스럽게 죽게되면서 공녀들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수 있었던 다행스러운 케이스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 사신들의 횡포 고려시대 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의 사신들은 조선조정에게 황제에가 바치는 공녀라고 속여 사적으로 공녀들을 수십명씩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또 고려때는 결혼도감 이 있었다면 조선때는 진헌색이 있었는데 공녀를 구하러 오는 중국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면 조정에서는 전국에 결혼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면서 딸을 숨기거나 머리를 깍아 비구니로 만들기도 했고 10살도 안된 어린 아이를 결혼시키는 편법도 썼다고 합니다 공녀징집에 얽힌 비극적 살인사건 이야기 조선시대 경상도의 정황이라는 자는 딸이 공녀로 뽑혀 한양으로 올라가자 그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가는 도중에 딸의 얼굴에 약을 발라서 얼굴을 상하게 했는데 이 일이 호송을 맡았던 관리에게 발각되자 이를 숨기기 위해서 당시 딸을 호송했던 최응벽이라는 자가 자기딸을 강간했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됩니다
결국 최응벽은 사형당하고 최응벽의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다면서 정황을 칼로 살해하고 맙니다 딸은 얼굴이 상하고 낯선남자에게 범해져 공녀 징집을 피할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살해되고 호송임무를 맡은 관리는 죽게된 비극적 사건입니다 이별의 자리 우여곡절 끝에 선발된 공녀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왕과 왕비가 차린 전송식에 불려가 위로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여인들은 차린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았고 죄다 슬퍼서 울기만 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함께 자리를 한 처녀들의 부모들도 덩달아서 울었는데 그 통곡의 소리가 궁궐을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이후 처녀들은 근정전에 비치된 가마에 올랐는데 가마에는 2명씩 들어가고 중국 사신은 공녀들이 호송중 도망가지 못하게 직접 자물쇠를 채웠다고 합니다
공녀들이 출발할때에는 왕과 왕비까지 모화관에 나와서 전송을 했습니다 눈물의 환송식을 뒤로한채 공녀들은 한양 개성 평양 안주 의주 요동 북경에 달하는 꼬박 2달이 걸려서 도착하는 긴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이들은 임시로 지은 각 참의 숙소에서 잠을 잤는데 호송하는 도중 환관들에게 희롱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겨울에는 만주벌판의 추위에 시달렸고 여름에는 더위로 병을 얻기 일수 였다고 합니다 여자는 공녀로 남자는 내시가 되어 중국에 갔다 조공으로 받쳐진건 사실 그시절의 여자들만이 아니였습니다
남자들도 환관으로 받쳐졌는데 조선 태종임금때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영락제가 안남(북베트남)을 정벌하고 고자들을 데려왔지만 멍청해서 못 쓰겠다며 조선에 300명의 환관들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태종은 29명의 환관들을 명나라로 보내게 됩니다 영락제는 조선의 고자들이 예의가 바르고 빠릿빠릿해서 매우 좋아 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공녀는 대한제국시대까지 이어졌다? 위안스카이는 한국에는 원세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중화민국의 초대 황제였습니다 중국의 청말기에서 중화민국까지의 시기는 우리의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절과 그 시기가 겹칩니다 위안스카이는 1882년 조선에와서 당시 중국인 본부인이 있었음에도 3명의 첩을 얻습니다
원래는 양반가인 안동김씨 규수를 얻었지만 그 규수를 보조하기 위해서 따라온 몸종 두명까지 모두 자신의 첩으로 취합니다 양반가 규수였던 김씨는 3명의 조선인 첩들 중 가장 나이가 적어서 자신의 몸종으로 왔던 이씨와 오씨 , 즉 두명의 다른 첩들을 손 윗사람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양반출신인 자신이 몸종이였던 사람들을 손윗사람으로 모셔야 했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고 합니다
공녀조공의 흔적들 공녀의 역사는 생각보다 엄청 깁니다 오랜시기 동안 이어졌고 그래서 우리민족의 역사에 그 흔적들을 남기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조혼을 하는 풍습인데 요즘 사람들은 결혼 연령이 늦어져 저출산을 걱정해서 조선시대 조혼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조선시대 조혼은 공녀징집을 피하기 위해서 양반층이 먼저 시작하면서 당시의 대표적인 문화로 자리잡게 됩니다
구한말 한국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는 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조공의 빈도와 여성 송환은 당시의 복잡한 외교적 상황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국제 관계를 바라보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며,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환향녀들의 이야기
환향녀(還鄕女)는 중국 궁중에서 복무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의 귀환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며, 대부분 다음과 같은 경우에 가능했습니다
: 황제의 특별한 은혜로 인한 귀환
정치적 변동으로 인한 귀환
고령이 되어 허락받은 귀환
질병으로 인한 귀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에 파견된 여성들 중 약 5% 미만만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온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궁중에서의 생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환향녀들이 겪은 고초]
언어와 문화적 차이 중국어를 모르는 상태에서의 의사소통 문제 낯선 음식과 생활습관 적응의 어려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 신분적 차별 조공녀라는 이유로 받는 멸시 하급 궁녀로서의 고된 노동 자유로운 외출 제한 심리적 고통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우울증 귀향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의 절망감 타국에서의 고립감 [돌아오지 못한 여인들의 운명] 대다수의 조공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황제나 고위관리의 후궁이 된 경우 현지에서 혼인한 경우 궁중에서 사망한 경우 귀환 허가를 받지 못한 경우 특히 당나라 시대에는 많은 조공녀들이 궁중 무용수나 악사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고된 생활 끝에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조공제도의 변천사]
당나라 시대 (618-907) 가장 활발한 조공이 이루어진 시기 연간 약 1000명의 여성이 조공됨 비단길을 통한 국제무역의 전성기 송나라 시대 (960년부터 1279년까지) 여성 조공의 감소 문물과 특산품 위주의 조공으로 변화 해상 실크로드의 발달 원나라 시대 (127년부터 1368년까지) 몽골제국의 영향으로 조공제도 약화 강제적 성격의 조공 감소 상업적 교역의 증가 명나라 시대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조공제도의 재정비 해금정책으로 인한 조공무역의 중요성 증가 정기적 조공 일정 확립 [조공제도의 종말과 근대화 과정] 청나라 후기 (19세기)까지 이어진 조공제도는 서구 열강의 등장과 함께 급격히 변화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주요 변화를 살펴보면: 아편전쟁 이후의 변화 불평등 조약체제의 도입 전통적 조공질서의 붕괴 서구식 외교 제도의 도입 조공국들의 독립 의식 강화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의식 변화 근대적 국가 개념의 수용 평등한 외교 관계 요구
[조공 무역의 경제적 의미]
조공은 단순한 공물 제공이 아닌, 국제 무역의 한 형태였습니다.
공식적 무역 경로 조공품 운송을 위한 정기적 교역로 확보 항구와 도시의 발전 국제 물류 네트워크 형성 부가적 경제 효과 사적 무역의 활성화 문화 교류의 증진 기술 전파의 통로
[조공품의 종류와 특징]
생활용품 비단, 도자기, 茶具 귀금속 장신구 서적과 문방구류 자연물 진귀한 동물 (코끼리, 공작새 등) 약재 (인삼, 사향 등) 보석류 (진주, 옥석 등) 특산물 향신료 귀금속 지역 특산 직물
[책봉제도의 실제적 의미]
책봉은 형식적으로는 종속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의미 국제적 지위 인정 왕권의 정당성 확보 외교적 안전보장 경제적 이점 공식적 무역권 획득 경제적 특혜 향유 시장 접근성 확보 문화적 영향 선진 문물 수용 기회 학문 교류의 통로 문화적 정체성 형성
[조공제도가 현대에 미친 영향]
동아시아 국제관계 역사적 갈등의 근원 문화적 유대감 형성 지역 협력의 기반 문화적 유산 공통된 문화권 형성 한자문화권의 확립 예술과 문학의 교류 현대적 시사점 국제질서의 다양성 이해 문화 교류의 중요성 평화공존의 모델
[조공제도의 현대적 해석]
오늘날의 관점에서 조공제도를 재해석하면: 국제질서의 관점 다자간 외교 관계의 원형 평화 유지 메커니즘 문화적 다양성 존중 경제적 관점 초기 글로벌 무역의 형태 지역 경제 통합의 모델 문화 산업의 교류 문화적 관점 문화 전파의 통로 지식 교류의 플랫폼 예술적 영감의 원천
[조공제도의 교훈]
국제관계에서의 시사점 평화적 공존의 가능성 문화적 교류의 중요성 상호 이해의 필요성 현대 사회에 주는 교훈 다양성 존중의 중요성 문화 교류의 가치 평화로운 국제질서의 구축 방안 이러한 조공제도는 형식적으로는 19세기 말에 종식되었지만,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와 문화 교류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조공제도 속 여성들의 구체적인 삶]
궁중 기록과 문헌을 통해 본 조공녀들의 세부적인 생활상을 살펴보면:
궁중 생활의 일상 새벽 4시 기상 엄격한 궁중 예법 교육 중국어와 예술 교육 필수 외출 금지와 격리된 생활 10년 이상 가족과 연락 단절 신분별 역할 구분 궁녀: 청소, 세탁, 시중들기 무용수: 연회 공연과 춤 교육 악사: 궁중 음악 연주 후궁: 황제의 총애를 받은 특별한 경우
[실제 기록에 남은 조공녀들의 이야기]
신라 시대 김씨 가문의 처녀였던 김순인(金順人)의 경우: 15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조공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주목받음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비까지 오름 말년에 귀향을 허락받았으나 거절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
고려 시대 최씨 가문의 처녀였던 최연화(崔蓮花)의 사례: 17세에 조공녀로 선발 10년간의 궁중 생활 후 병으로 귀향 귀국 후 회고록 작성 조공녀 생활의 실상을 상세히 기록
[조공 제도의 지역별 특징]
한반도의 조공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조공 시스템 문화적 유사성으로 인한 적응력 높은 귀환 불가능률 베트남의 조공 주로 특산물 중심의 조공 현지 문화 유지에 강한 의지 정치적 독립성 유지 노력 류큐의 조공 중계무역 중심의 실리적 접근 독자적 문화 발전 도모 이중 조공을 통한 생존 전략
[조공 제도가 남긴 문화적 유산]
예술적 측면 동아시아 공통의 미적 감각 형성 음악과 무용의 교류 문학적 소재로서의 활용 기술적 측면 도자기 제작 기술 전파 농업 기술 교류 건축 양식의 영향 언어적 측면 한자 문화권의 형성 공통 어휘의 발달 문자 체계의 영향 [
{조공 제도의 현대적 의의]
외교적 측면 평화적 국제질서 구축의 모델 문화적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 다자간 협력체계의 원형 경제적 측면 초기 국제무역의 형태 지역 경제블록의 선구적 모델 문화산업 교류의 기반 사회적 측면 다문화 사회의 역사적 경험 문화적 다양성의 포용 국제적 네트워크의 형성
[조공제도의 종식과 그 이후]
서구 열강의 등장 불평등조약 체결 전통적 질서의 붕괴 새로운 국제질서 도입 근대화 과정 서구식 외교제도 도입 평등한 국제관계 지향 문화적 정체성 재정립 현대적 변화 경제적 협력 강화 문화 교류의 활성화 새로운 지역 협력체계 구축 조공과 책봉 제도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를 형성했던 독특한 시스템이었습니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종속관계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각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복잡한 외교관계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현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며, 미래의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어 귀중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과거 수천년이상을 사실상의 종속관계에 있었던 중국과의 관계는 과거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주석이 미국에서 회담중 트럼프에게 한국은 과거 수천년간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얘기를 전했다고 합니다
이는 아직도 중국이 아시아에서 주변국들을 바라보는 눈높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더욱 강력한 국력으로 다시는 이런 초라한 역사가 되풀이 되질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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