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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최고의 부자, 그의 재산은 어디로 갔나?

매국노 윤덕영매국노 윤덕영
매국노 윤덕영
매국노 윤덕영
매국노 윤덕영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윤덕영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합니다

경술국적 8인 중 한명으로 일제강점기에 조선귀족 자작위를 수여받았으며 본관은 해평. 부친은 증영돈녕부사 윤철구, 조부는 의정부의정대신 윤용선입니다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의 백부이며 즉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형입니다

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10대손입니다

1894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1895년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귀국하였습니다

총리대신 비서관 겸 참서관, 시독관, 내부 지방국장, 법무국장 등에 임명되었습니다

1901년 경기도관찰사로 궁내부특진관을 겸임하였고 그 후 경기도, 황해도 관찰사와 대한제국 광무 4년에 설치된 관청인 철도원 부총재 등을 지냈습니다 조카 순정효황후가 황후에 책봉된 다음해인 대한제국 융희 2년 서기 1908년 시종원경에 임명되었습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에 사망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회를 열었소 대한제국 융희 4년인 서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에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국새를 빼앗는 따위의 방법으로 늑약 체결에 가담하여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가 한일 합방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그의 조카 딸인 순정효황후는 자신의 치마 속에 옥새를 숨겨두었으나 결국 조카딸인 순정효황후의 치마속을 뒤지고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하였습니다 황후의 치마속을 뒤진다는건 상상못할 행위임에도 자신의 출세와 입신양명,일제에 충성하고자 이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자 입니다

 

매국노 윤덕영의 자택매국노 윤덕영의 자택
매국노 윤덕영의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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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윤덕영의 자택
매국노 윤덕영의 자택매국노 윤덕영의 자택
매국노 윤덕영의 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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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훈1등 자작으로 합방 은사금 5만 엔을 받았으며, 이왕직찬시(李王職贊侍)가 되었고 곧 장시사장(掌侍司長)이 되었습니다

1917년 순종의 일본 다이쇼 천황 방문 추진에 관여하였고 2년 후 영친왕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소문으로 떠돌던 고종 독살설에서 윤덕영은 고종을 독살한 인물로 의심 받고 있습니다 1919년 고종의 사망 당시 조선총독부의 임명장인 첩지를 위조하여 물의를 빚었으며 고종의 부묘의식 때는 수고한 민간에게 참봉 등 상작을 주던 옛 법을 이용하여 차비원(差備員) 명목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여사군(轝士軍)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1925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0년 사망 직전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1939년 창씨 개명을 놓고 해평 윤씨 문중 종친회가 열렸을 때 강력하게 창씨 개명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윤치호에 의하면 그의 자존심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 합니다 순종의 천황 알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천황을 알현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민심이나 황실 분위기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후임으로 제2대 조선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천황 알현의 중대 사안은 모두 하세가와에게 맡긴다는 말을 남겼고 하세가와는 대한제국 황제의 천황 알현을 직접 지휘하여, 처음에는 이완용을 시켜서 성사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하세가와는 윤덕영을 통하여 이를 추진하였고 윤덕영은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을 일주일간 대면을 통하여 압박하였는데

고종이 피곤하여 누우면 윤덕영은 별실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종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결정을 독촉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에 윤덕영은 이왕직 차관 고쿠부 쇼타로와 공모하여 당시 이왕직 장관인 민병석의 동의와 하세가와 총독의 뜻에 따라 덕수궁 내의 십보기구를 정리한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덕수궁 내의 크고 작은 창고부터 고종의 신변의 문고서함까지 엄밀히 검사하여 개개마다 봉인을 붙였고 또 이 물건들을 보관하던 상궁을 파면하여 궁 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크게 분노하였으나, 윤덕영은 상시사장의 직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윤덕영은 당시 30여 년이 지난 일도 들추어내었는데 그것은, 30여 년 전 명성황후 사후 왕후를 다시 맞기 위하여 김씨 가문의 규수가 간택 확정되었지만 왕실 사정에 의하여 30여 년간 규방에 머물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윤덕영은 이 일을 고종에게 꺼내며 고종을 압박하였는데, 매일 오후 2시부터 오전 2시 무렵까지 고종 앞에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은채 고종이 결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윤덕영은 당시 47세가 된 김씨 규수를 덕수궁에 입궁시켰으나 고종은 정화당이라는 당호만을 내리고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결국 천황 알현을 허락하였는데, 자신 대신 창덕궁에 머물던 순종에게 알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왕궁 비사의 저자 곤도 시로스케(権藤四介)는 이런 윤덕영의 모습을 "옛 신하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리한 시도까지 하면서 한일 병합 이후 중대한 안건을 해결하였다"

"그 집요함, 대담함, 거칠 것 없음 그리고 옛 신하로서의 정이나 예의라고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는 상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그 수단의 신랄함, 냉혹함, 거기에 끈질김은 참으로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은 생전 고영희에게 명하여 명나라의 황릉을 본따서 경기도 금곡에 왕릉을 조성하였는데, 윤덕영은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에 위치하여 있는 명성황후의 홍릉에 합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곤도 시로스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주장의 이유는 당시 한일병합 이후 능(陵)이라는 존칭을 사용할 수 없어서 나온 주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윤덕영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1910년부터 계속 매입하여 넓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10년 넘는 기간 동안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대저택을 건설하여 1935년 완공시켰습니다 그러나 5년 뒤인 1940년에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가 사용한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윤덕영은 1873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원래 그리 특별하지 않았지만, 그의 조카인 윤정순이 순종황제의 황후가 되면서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루게 됩니다.

조카가 황후가 된 후, 윤덕영은 대한제국의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고, 이를 통해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권력을 나라를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 윤덕영은 일본 측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그는 황제의 친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일본과의 협력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특히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서 윤덕영의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그는 순종황제를 설득하는 데 앞장섰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일본으로부터 작위와 거액의 돈을 받았습니다.

윤덕영의 재산 축적 과정은 실로 놀랍습니다. 그는 일제로부터 받은 보상금과 토지를 기반으로, 민간인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의 총재산은 약 1000만원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조원이 넘는 규모입니다.

서울 도심의 주요 땅들과 현재의 강남 일대 대부분의 넓은 토지를 소유했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해방이 되자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친일파 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 그의 재산은 모두 동결되었고, 그는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1950년 한국전쟁 중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해방 전후로 일본으로 도망갔으며, 현재는 그의 재산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친일파 재산을 국가로 귀속시켰기 때문입니다.

윤덕영의 권력 남용은 단순히 재산 축적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특히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에 동원하는 데 협력했습니다. 자신의 민족을 일제의 전쟁 도구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윤덕영은 또한 창덕궁과 덕수궁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재산 문제를 넘어서는 문화적 약탈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매우 호화로웠습니다. 현재의 서울 중구 필동에 있던 그의 저택은 당시 최고급 양옥집이었으며, 수십 명의 하인들을 거느렸다고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하면서, 자신은 가장 먼저 '마에다 도쿠에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윤덕영의 친일 행적 중 가장 비극적인 것은 자신의 조카인 순정효황후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입니다. 황실의 위엄을 훼손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해방 이후 그의 최후는 매우 비참했습니다. 친일파 체포령이 내려진 후, 그는 서울 시내 여러 곳을 전전하며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더욱 궁지에 몰렸습니다. 결국 그는 피난 중에 굶주림과 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권력과 부를 누리던 그가 한 떠돌이처럼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윤덕영이라는 이름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친일 행적이 후손들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윤덕영의 친일 행적이 더욱 악랄했던 것은 그가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는데 앞장섰다는 점입니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도 적극 동참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해 탄압받을 때도, 그는 오히려 이를 독려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교육 분야에서의 그의 행적입니다. 그는 조선의 학교들에서 우리말과 우리 역사 교육을 금지시키는데 앞장섰습니다.

윤덕영은 또한 일제의 민족분열 정책에도 적극 가담했습니다. 그는 친일파들을 규합하여 조선인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습니다.

그의 악행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하여 많은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에서 소작농들에게 터무니없이 높은 소작료를 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윤덕영의 재산 축적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부동산 투기였습니다. 그는 일제로부터 얻은 정보를 이용해 개발 예정지를 미리 사들였습니다.

당시 그가 소유했던 토지는 현재의 서울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일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현재 가치로 수십조 원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그의 친일 행적은 문화재 약탈에서도 드러났습니다. 그는 조선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반출하는데 협조했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이득을 챙겼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덕수궁의 귀중한 보물들을 일본으로 빼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었습니다.

윤덕영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피난 중에 노상에서 병사했다고 하고,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생전에 누렸던 부와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윤덕영의 친일 행적이 특히 악랄했던 것은 그가 조선의 마지막 황실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순종황제의 최측근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황실의 권위를 훼손시켰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배신을 넘어서는 민족적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고종황제 승하 당시의 정황입니다. 당시 고종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있었음에도, 윤덕영은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방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일제의 황실 재산 약탈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를 일제에 넘기는데 앞장섰습니다.

윤덕영의 권력 남용은 교육 분야에서도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식민지 교육 정책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특히 그는 우리말과 우리 역사 교육을 금지시키는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고, 일본어 교육을 의무화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윤덕영이 남긴 부정적 유산 중 하나는 친일 관료 양성에도 관여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많은 젊은이들을 일본 유학을 보내면서, 이들이 친일파가 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의 토지 약탈 과정에서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이용해 많은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했는데, 특히 항일 운동가들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빼앗았다고 합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부인 김복수,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양손자 윤강로와 함께 선정되었습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윤덕영 소유의 토지에 대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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