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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억울해요" 한 남자의 마지막 외침!

조 애리디의 억울한 죽음
조 애리디의 억울한 죽음

 

조 애리디 , 가장 순수한 영혼이 사라지다

조 애리디는 미국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사법살인의 희생자로 남아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1915년,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신연령은 겨우 6세 정도였으며,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던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더욱 냉혹한 시기였으며, 사회는 그들을 배척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단순히 ‘이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끔찍한 사건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누명

조 애리디의 억울한 죽음
조 애리디의 억울한 죽음

 

1936년,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한 소녀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빠르게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마침 근처를 떠돌던 조 애리디가 눈에 띄었습니다.

경찰은 그를 체포하고 강압적인 심문을 벌였습니다.

문제는 조 애리디가 정신적 장애로 인해 경찰의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예’라고 대답했고,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진범으로 지목된 프랭크 아고스틴이 이미 체포되어 있었고, 그가 단독 범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도 충분했지만, 경찰은 조 애리디를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미소를 짓다

조 애리디는 감옥에서도 끝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도관들과 친해졌고, 작은 기차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형당한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형 집행일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해맑게 웃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1939년 1월 6일, 조 애리디는 가스로 처형되었습니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도 그는 미소를 지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지켜보던 교도관들은 눈물을 흘렸고, 이후 그를 ‘가장 행복한 사형수’라고 불렀습니다.

조 애리디의 억울한 죽음
조 애리디의 억울한 죽음

하지만 그 미소는 그가 처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법살인이 남긴 교훈

조 애리디의 죽음은 미국 사법 체계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명백한 희생양이었고, 무죄였음에도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 사회의 비극적인 단면이었습니다.

법은 정의를 실현해야 하지만, 때로는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형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조 애리디처럼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억울한 희생양이 될 수 있습니다.

조 애리디는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후대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11년, 콜로라도 주지사는 공식적으로 그의 사면을 발표하며 조 애리디가 무고했음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부디 그의 미소를 기억해 주세요. 그것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영혼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습니다.

조 애리디는 1915년 4월 29일 미국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헨리, 어머니는 메리였으며 부모님은 일자리를 찾아 시리아에서 막 이사온 참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영어를 하지 못했고 모국어로만 대화하였습니다

헨리는 푸에블로에 있는 대형 제철소에 취직해 일하였습니다

애리디는 말이 늦었고 몇마디 이상의 문장을 말로 해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는 1학년 밖에 못 다녔는데 이유는 교장이 수업을 배우지도 못한다며 부모에게 집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몇년 뒤에 헨리는 실직합니다

애리디는 10살 때 콜로라도주 그랜드잭션에 있는 정신장애인들을 위한 주립가정양성학교에 입학합니다 그 곳에서 반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한 애리디는 학교에서 도망쳐나와 화물열차를 타고 마을을 떠납니다 그리고 1936년 8월 와이오밍주 샤이안에 도착하였습니다

8월 14일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집에서 자고있던 도로시 (15세 여성), 바버라 (12세 여성)의 집에 누군가가 침입했고 두 사람은 몹쓸짓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에 손도끼로 공격을 당했으나 바버라는 살아남았으나 도로시는 사망했습니다

8월 26일 애리디는 와잉밍주 샤이안의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다가 이유도 모른체 체포당했습니다 이 때 그에게 물었던 죄는 도로시 살해가 아닌 떠돌아다니고 있어서 일단 체포한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 군 보안관 조지 캐럴은 도로시 살해사건 수사 진행 사실을 알게되었고 애리디가 콜로라도주 그랜드잭션을 나와 고향 푸에블로에 돌아간 사연을 전해듣고 위 사건을 물은 뒤 범행을 자백받았다고 꾸밉니다 그 후 이를 푸에블로 경찰에게 알렸지만 사건의 핵심 용의자로 멕시코 노동자 프랭크 아기랄이 체포된 상황이었습니다 아기랄은 이 집안의 가장 드레인의 밑에서 일하다가 사건 직전에 해고된 상태였습니다 아기랄의 집에서 손도끼의 머리부분이 회수됐고 캐럴은

"애리디가 프랭크라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고 몇번인가 말했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기랄은 자신이 범행을 했다고 주장하며 애리디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고 경찰에 밝혔고 결국 아기랄이 도로시 살해 및 강간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37년 아기랄이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애리디는 푸에블로에서 자신의 범행을 다시 자백하지만 내용이 오락가락하고 진실과 거짓말을 섞어서 발언합니다 곤봉으로 죽였다고 했다가 경찰이 손도끼가 범행에 사용됐다고 말하자 손도끼로 범행을 했다고 말을 바꾸고 지능이 모자란 그는 계속 횡설수설했다고 합니다 결국 애리디가 재판을 받게되긴 하지만 변호사들은 그의 정신이상을 주장합니다

애리디가 제정신이라고 판정을 받지만 정신과 의사 3명이 애리디의 IQ는 무려 46밖에 되지않는 6살 수준의 지능이며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도 없고 범죄를 목적으로 한 행동을 실행하기 어렵다 주장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사건의 피해자까지 나서서 아기랄이 범인이고 애리디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렇지만 애리디는 이미 범인이 체포되어 처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자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맙니다 (그 후 연구에서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들은 심문을 당하는 도중에 강제적으로 허위 자백을 하는 빈도가 높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변호사의 필사적인 변호로 애리디의 사형을 연기하긴 했지만 유죄판결을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변호사는 애리디가 사형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며 그가 가스실에서 처형당한다는 것은 콜로라도주 역사의 큰 오점이 될 것이라 대법원에 주장하였습니다 변호사는 애리디는 대신하여 상소와 청원을 하며 사형집행 유예를 받아냅니다

상소진행 과정에서 애리디는 교도소장 로이 베스트가 준 장난감 열차를 가지고 놀았고 베스트는 애리디에 대해서 가장 행복한 사형수라고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애리디는 교도소 직원들과 동료 죄수들도 좋아했고 베스트는 애리디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39년 1월 6일 애리디는 사형집행을 위해 가스실로 이동합니다

사형을 집행당하기 전 베스트는 애리디 대해서

"애리디는 자신이 죽는 줄도 몰랐다.

애리디는 내가 준 장난감 열차에 앉아 즐겁게 놀았다."

라고 했습니다

애리디는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처형에 대해 설명을 들었을 때는 당황하며 "아냐, 아냐, 조는 죽지않을거야"

라고 베스트에게 말하였으며 가스실로 끌려간 애리디는 웃었고 베스트의 손을 잡자 긴장했던 표정이 안심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조금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형당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23세였습니다

2011년 애리디는 콜로라도주 주지사에 의해 사면되었고 콜로라도주에서 사형을 집행한 뒤에 죄인의 죄를 사면한 것은 애리디가 첫 사례였다고 합니다 사형집행 당일 애리디가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모르고 마냥 웃고 있자, 교도소 측에서 사형이라는 개념을 설명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사형의 의미를 알게 된 애리디는 두려움에 떨며 매우 당황해 했는데, 애리디와 꽤 돈독한 관계였던 교도소장이 직접 애리디를 손을 잡고 안심시켜, 사형장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정작 진범인 프랭크 아귈라는 애리디의 체포 후 몇시간 뒤에 잡혔는데, 그는 애리디의 사형 집행과 같은 해인 1939년 8월 17일에 사형되었다고 합니다 생전 애리디와 함께 심문받기도 했는데, 애리디는 침묵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심문 후 자백서에 서명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으며 아귈라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알던 사이이고, 경찰 수색에서 범행도구와 범행 계획 등이 발견되어 진범임이 거의 확정시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두 건의 살인미수 사건에도 용의자로 지목되어 있었고, 드레인의 장례식에서도 경찰에 연행되었던 전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누명을 쓴 것이 밝혀졌으며 2011년 콜로라도주 주지사에 의해 사면되었고 이러한 사법살인으로 인해 현재 미국은 지적장애인에 대한 사형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안타깝게 세상과 이별한 조 애리디 그의 순수한 모습이 선합니다.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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