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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1911년 3월 1일 경기도 연천군에서 태어난 김수임은 개성 선죽교 아래 빈민촌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자랐습니다
집안은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해 불과 11세에 민며느리로 15세 신랑에게 팔려가다시피 했습니다
명랑하며 솔직했던 소녀 김수임은 철없는 신랑의 횡포를 못 이겨 가출했다고 합니다
김수임 사회생활
미국인 독신녀의 양녀가 된 그녀는 이화여전 영문과에 들어가 작가지망생 모윤숙과 기숙사 룸메이트로 지냈다고 합니다
김수임은 영어회화에 뛰어나 광복 전 세브란스병원 미국인 치과과장의 비서이자 통역으로 취직했습니다
김수임 이상국 러브스토리
그 당시 공산주의자 이강국을 만나 사랑하게 되어 동거했으나 헤어졌다고 합니다
김수임이 언제 이강국을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정설은 없습니다
그러나 공판 당시 김수임은 “이강국을 안 것은 1942년 즉 지금으로부터 약 9년 전 동무의 집에서 윷을 놀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 다음날 이강국으로부터 점심을 먹자고 하는 청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친하게 되었던 것이며 나 자신도 이강국을 처음 보았을 적에 첫 인상이 좋았고 인격이 고상하고 수재이고 독일 유학까지 하여서 교제하였다.”고 한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광복 후 이강국은 자신을 찾아온 김수임에게 비서를 제안했으나 정작 김수임 자신은 미국인 통역을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1945년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1946년 가을 헌병감이 된 베어드 대령의 특별자문으로 고용돼 1949년 6월까지 미국 정부의 월급을 받았습니다
김수임은 모윤숙이 만든 ‘낙랑클럽’이라는 주한 미군 대상의 사교 클럽에서 미국인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베어드와 동거하면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부상했습니다
한편 김수임의 간첩사건으로 지목된 공소기록에 등장한 이강국은 당시 북한의 상업성 국장으로 남로당의 주요인물이었습니다
이강국
이강국은 1906년 2월 7일 경기도 양주(楊州)의 몰락한 사대부 집안에서 이기태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1925년 보성고보를 우등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습니다 1930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잡지 『신흥』을 발행했으며 1931년 박문규, 유진오, 최용달 등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朝鮮社會事情硏究所)를 창립했습니다 자산 300만원의 부호였다는 처가의 도움으로 1932년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유학했습니다
재학 중 프롤레타리아과학동맹 등의 단체에 간여하면서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강국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가 중심이 된 독서회 그룹에 독일공산당원으로 가담했습니다 나치스의 탄압과 일본영사관의 박해로 인하여 1935년 귀국했습니다 기소중지 중이었던 그는 귀국과 동시에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935년 12월 28일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잡지에 기고하는 등 지식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주하(李舟河), 최용달 등과 원산(元山)에서 반파시즘운동과 민족해방전선의 통일을 꾀하려고 좌익노조를 결성하였으며 결국 원산 철도국 사건(원산 민족해방전선사건) 등으로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보석으로 석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2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1945년 8·15광복 전 건국동맹 관계로 여운형과 긴밀히 연락했으며, 광복 후 본격적으로 공산주의활동을 재개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 약칭 건준)에 참여했습니다
건준 조직부장을 맡았지만 박헌영(朴憲永)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전부터 8월테제 작성에 간여하는 등 박헌영과 가까워졌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 체신부장 직무대리와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1946년 2월 좌익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 등을 지냈습니다 미군정이 1946년 5월 조선정판사사건을 계기로 하여 조선공산당 건물들을 철저히 수색하자 박헌영 그룹은 미군정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1946년 7월 소위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면서 합법과 비합법의 전술을 배합하는 ‘신전술’을 채택하여 반격을 준비하였습니다
1946년 9월초 미군정은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의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지만, 이강국이 9월 18일 밤 9시 평양방송 전파를 탐으로써 월북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강국은 월북 후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12월 인민군 야전병원장(제69호 병원장: 두만강 부근 소재), 1951년 11월부터는 무역성 산하기관으로 일반제품을 수입하는 회사인 조선상사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953년 남로당(南勞黨)사건에 연루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5년 12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공안당국은 김수임의 간첩 혐의를 감지하고 그녀를 체포하려했지만 김수임의 배후에 당시 거물 실세 베어드 대령이 있다고 생각하여 쉽게 체포하지 못하다가 당시 수사검사가 그녀를 시인 모윤숙의 집으로 유인해 1950년 4월 17일 체포했습니다
김수임 사형의 미스테리
김수임에게 붙여진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이적행위’였으며 전쟁 발발 10여 일전인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된 군법회의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당시 혐의는 무려 19가지였다고 합니다
골자는 동거 중이던 베어드로부터 비밀정보를 빼내 전 애인이었던 이강국을 통해 남로당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1946년 9월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의 지프로 이강국을 개성까지 데려다 주었다거나, 1947년 12월 이강국이 남로당에 보낸 공작비(日銀券)를 땔감으로 가장, 베어드 대령이 제공한 군용트럭으로 서울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1946년 9월 이강국의 월북 시 지프차를 동원하여 도왔다는 혐의는 검토가 필요한 부분인데, 당시는 아직 베어드와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던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강국은 1946년 9월 박헌영의 지시로 미국차관 도입 반대 명령서를 민전명의로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체포명령서가 내려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북의 자료에 의하면 이때 박헌영이 월북하라고 지시하여 월북 문제를 베어드와 상의했다고 합니다
북한에 있는 이강국과 연락했으며 1948년에는 지하에 숨어있는 남로당원 박민호·김용봉 등에게 계속 대한민국에 불리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자기 이복동생이며 남로당원인 최만용과 박민호에게 각각 지프차를 제공하여 남로당 사업을 방조하는가 하면 그들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등등 역력한 이적행위를 수없이 감행하였다는 혐의였습니다
심지어는 육군특무대에 사형수로 수감 중이던 남로당의 빨치산책(군사부 프락치 총책)인 이중업(李重業)을 빼내 의사로 가장시켜 월북시켰다는 소설 같은 얘기도 혐의로 등장했습니다
군사법정은 물적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재판부가 인정한 증거 중의 하나인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에게 건네받았다는 정보는 이미 한 간행물에 게재된 내용이었습니다
오제도(당시 사건검사)가 증거로 제출한 권총은 재판과정에서 기각되었습니다
또한 오 검사는 간첩으로 지목된 이중업과 김수임을 서로 연관시키려했으나 검찰 상부에서는 억지라고 판단해 당시 기소항목에서도 제외됐습니다
이렇게 자백 등에 의거해 김수임에 대해서 사형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김수임에게 붙여진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이적행위’였으며 전쟁 발발 10여 일전인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된 군법회의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당시 혐의는 무려 19가지였습니다 1950년 6월 16일 벌어졌던 마지막 재판에서 법정은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재판장은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간첩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요지로 판결했습니다
군법회의 판결문은 규정 상 영구 보존되어야 하지만 현재 김수임 판결문은 행방불명입니다
1955년 북한에서 ‘미 제국주의 간첩’ 혐의로 처형된 이강국은 박헌영에 이어 남한 공산당 2인자로 꼽히던 인물이었습니다
1906년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보성고보를 학업 우수 장학생인 ‘면비생’으로 졸업한 이강국은 경성제대 법학부 2기로 입학했습니다 경성제대 ‘적색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로부터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배우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처남 조준호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독일 베를린대학에 유학했습니다
이강국보다 세 살 많은 처남 조준호는 동아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한 명치정(明治町·지금의 명동 일대) 주식계의 제왕이었습니다
동아증권은 조선인, 일본인 소유를 통틀어 명치정에서 가장 큰 증권회사였으며 명동 사보이호텔이 그의 소유였습니다
이강국은 처남이 ‘주식’을 사고팔아 보내준 학비로 독일에서 공산주의를 연구하고 독일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습니다
귀국 후 동아증권 이사가 되었고, 같은 시기 원산에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지원했습니다
1938년 원산에서 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년 후 보석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전숙희의 실화소설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의하면, 김수임이 이강국을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부인’ 부탁으로 원산형무소로 그를 면회하러 갔던 이화여전 영문과 선배 모윤숙을 따라갔을 때였습니다 수필가이자 파라다이스그룹 설립자의 누나인 전숙희는 이 소설 서문에서 “나는 학교 선배인 김수임의 따뜻한 인품과 순진함에 반했고 수임 언니와 나는 한때 ‘옥인동 19번지’에서 같이 살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옥인동 19번지’는 이완용이 살았던 저택으로 미 육군 24군단 헌병감 베어드 대령이 김수임을 위해 마련해준 ‘사랑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수배령이 내려진 후 이강국이 5일 동안 숨어 지내던 곳이었고, 김수임이 낳은 베어드의 아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이강국은 건국준비위원회 중앙위원회 집행위원, 조선인민공화국 서기장 등에 오르며 좌익 진영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1946년 2월 찬탁 반탁으로 좌우 대립이 격렬해지자, 남한 29개 좌익 정당 및 사회단체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했습니다 이강국은 사무국장으로 좌익 운동의 중추가 된 민전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습니다
해방 후 김수임은 미군정 고위 장교들의 숙소였던 반도호텔 총무과로 이직했습니다
활달한 성격으로 ‘종달새’라 불리던 김수임은 ‘낙랑클럽’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낙랑클럽’ 회원 전숙희는 단체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미군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를테면 한미 친선을 위한 모임이라고 할 수 있죠. 클럽 멤버는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일제 시대에 외국 유학을 갔다 올 정도의 교육받은 사람들, 또 잘살고 좋은 일도 많이 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집의 부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모윤숙씨가 만들었죠.
미혼은 한 명도 없었어요. 미군들의 파티가 열리면 낙랑클럽 회원들을 초대해요. 그럼 우리는 가서 같이 대화도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으레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어요. ”(‘8·15의 기억’) 요컨대 ‘많이 배운’ ‘있는 집’ ‘기혼 부인들’이 미군과 어울려 춤을 추며 ‘한미 친선’을 도모하던 ‘기괴한 모임’이었습니다
1946년 김수임은 미군 24군단 헌병감 베어드 대령의 ‘특별자문’으로 미군정에 고용되었고 ‘옥인동 19번지’ 저택에서 베어드 대령과 동거에 들어갔습니다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좌익 진영이 미군정을 상대로 반정부 투쟁을 노골화하자 1946년 9월 미군정은 박헌영, 이강국, 이주하 등 3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군정 경찰은 물론 미군 헌병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습니다
이주하는 이틀 만에 체포되었지만, 박헌영과 이강국은 요란스러운 수색을 비웃듯 월북했습니다
박헌영은 영구차를 동원해 38선 접경지역의 어느 선산에 매장하러 가는 듯 장례 행렬로 위장해 탈출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미군 헌병대가 이강국을 찾아 서울 시내를 수색하는 동안, 그는 ‘옥인동 19번지’ 미군 헌병감 저택에 숨어 있었습니다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에게 “개성에 있는 엄마가 아프다”며 의사를 데리고 개성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어드는 김수임에게 미군 지프차를 내주었고, 이강국은 의사로 변장한 채 그 차를 타고 개성으로 가서 유유히 월북했습니다
1950년 공안 당국은 김수임이 베어드를 통해 미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 북에 있는 이강국에게 넘긴다는 ‘간첩 혐의’를 인지했습니다
미군 헌병감 저택에서 체포하기 부담스러워 김수임을 모윤숙의 집으로 유인해 체포했습니다
김수임은 6·25 발발 10여 일 전인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이적행위죄에 해당하는 19가지 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장 김백일 대령은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간첩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1953년 북한에서 이강국은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 인사들과 함께 ‘미 제국주의 간첩’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재판에서도 김수임을 매개로 한 베어드 헌병감과의 ‘내통’이 주요 혐의로 다뤄졌습니다
‘한국의 마타하리’로 부르기엔 김수임은 간첩 행위로 얻은 것이 너무 없었습니다
김수임의 사형 집행 후 베어드 대령은 3개월에 걸쳐 수사를 받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음모가 배후에 있는 ‘이중간첩 사건’이라기보다는 한 여성을 가운데 두고 국적과 이념이 다른 두 기혼 남성이 저지른 불륜이 우연히 남과 북에서 간첩 사건으로 확대되었을 개연성이 커 보입니다
해방공간에서 미군 헌병대장과 공산당 간부 사이를 오가며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한국판 마타하리 사건’ 등의 수식어가 붙은 ‘여간첩 김수임 사건’이 실제로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AP 통신이 보도했습니다
AP는 “최근 공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1950년대 비밀문서를 보면 김수임의 간첩 혐의가 고문에 의한 조작일 수 있다는 근거들이 들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고아 출신으로 이화여전을 졸업한 미모의 인텔리 여성인 김수임은 미군 헌병대장 존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1949년 ‘미군 철수계획’ 등 주요기밀을 북한 쪽에 넘긴 혐의로 50년 3월 체포돼 한국전쟁 발발을 열흘 앞두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김수임은 또 대학 시절 사귄 북한 초대 외교부장 이강국을 46년 미군 지프에 태워 월북시킨 혐의도 받았습니다
비밀자료를 보면, 베어드 대령은 미군철수 계획에 대한 상세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고, 이 계획의 얼개는 이미 미군 기관지 <성조>에 보도된 것이었다고 통신은 전했습니다
특히 미군 정보기관의 자료에 이강국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조직인 ‘한국공동활동위원회’(JACK)에 의해 고용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통신은 전했습니다
이강국은 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미국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습니다
이들 문서는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김원일 미국 캘리포니아 라시에라대학 신학교수가 발견해 공개했습니다
비밀문서에는 김수임의 사형이 집행된 몇 주일 뒤 미군 수사관들이 미군 장교들을 조사한 결과 김수임의 자백은 서울 당국이 조작한 것이라는 진술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베어드 대령도 김수임 재판에 증거물로 제시된 지프나 군트럭, 라디오 등이 김수임과 관련이 없다고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문서는 특히 김수임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으며, 미군 철수 내용도 철수 뒤 해고를 걱정하던 미군정 사무실 동료들에게 전달한 것뿐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수임의 간첩 활동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녀의 행동이 단순한 사랑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이념에 의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 김수임은 한국 전쟁 시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간첩 활동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닌, 그 시대의 정치적 맥락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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