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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소련과 그 후신인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는 쿠릴 열도(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а́, 일본명 치시마 열도) 가운데 남단 4개 섬에 대하여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불거진 영토 분쟁. 남 쿠릴 열도 분쟁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흔히 북방영토 문제(北方領土問題), 또는 북방 4도 문제(北方四島問題)라고 칭 합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열도 분쟁의 역사를 쫓아가 봅니다.

 

1.역사

이 섬들의 원래 주민은 아이누였으나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론 일본과 러시아가 초기에 어느 쪽의 영토로 상호인식했는지 애매합니다. 일본은 1644년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시절부터 이미 일본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한편, 러시아는 자국 탐험가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포포프(Aleksey Alekseyevich Popov)가 1649년에 열도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양측 모두 17세기에 쿠릴 열도를 직접 지배지로 편성하진 못합니다.

 

쿠릴열도
쿠릴열도


18세기 들면서 쿠릴과 사할린 지역을 두고 러일 양국 간의 기싸움이 더욱 심화됩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마츠마에 번이 1754년 쿠나시르, 이투루프, 우루프 일대에 장소(가신의 지행지)를 설치하여 남 쿠릴 지역을 간접적으로 관리하였으며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1711년부터 카자크를 중심으로 하는 극동 탐사대가 캄차카 반도에서 홋카이도 동해안까지 탐사를 이어가며 쿠릴 열도 원주민들로부터 조세를 거두었습니다.

 

이 중 쿠나사르를 비롯한 남 쿠릴 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강했습니다. 1807년에는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러시아 상인들이 사할린, 이투루프 등에 위치한 일본인들의 거점을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오호츠크 해 일대를 두고 양국 간의 경쟁이 심화되었습니다.

 

1855년 일본과 러시아는 러일 화친조약(시모다 조약)에서 일본의 북방 국경을 이투루프-우루프섬 사이로 정하고, 사할린(일본명 가라후토)은 양국의 공동 거주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사할린 내 러시아와의 파워 게임에서 부담을 느낀 일본은 1875년 사할린에서 손을 떼는 대가로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제도) 전체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며, 이것이 성사되어 사할린-치시마 교환조약(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은 쿠릴 열도를, 러시아는 사할린 전역을 점유하게 됩니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제압하고 미국의 중재 하에 포츠머스 조약을 통하여 원래 러시아가 가졌던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까지 수중에 넣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독일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소련을 건들지 않을 테니 대신 일본이 동인도, 인도차이나 등을 침공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으며 서로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소련에 요구하여 1941년에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패망 이후 소련은 얄타 회담에서 대일전쟁 참전을 대가로 러시아가 본 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공으로 빼앗긴 러시아의 영토권을 회복하고 쿠릴 열도를 다시 이양받는 것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습니다. 전쟁의 대가를 미국으로부터 약속받은 소련은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개시, 일본 제국과의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련은 일본 제국이 항복한 이후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식적인 항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소련에 떼어주기로 미국이 약속한 영토를 남김없이 확보하기 위해 전투를 계속 개시해 1945년 8월 18일 슘슈 섬 전투를 시작으로 9월 3일에 쿠릴 열도 전역을 점령했습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국에 홋카이도 반분까지 요구했으나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쿠릴 열도 점령으로 만족했고 미국도 이를 묵인했습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열린 도쿄 재판에서 소일 중립 조약은 “성의 없이 체결된 조약으로서 소련에 대한 일본의 침략 기도를 진행하려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라는 판결을 통해 무효화되었으며 일본은 쿠릴 열도 전체의 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서명하였습니다. 정작 소련 본인들은 조약 작성에 초대되지 않았다는 점, 일본의 군국주의 재발에 대한 대책안이 없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가장 큰 피해국인 중국이 조약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이 구 영토의 영유권을 포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였지만 얄타 회담 때의 약속을 토대로 쿠릴 열도는 자연스럽게 소련의 영토로 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일본은 소련이 당시 조약을 통하여 가져간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군도는 쿠릴 열도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며 이때부터 소련에 반환 요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960년대에는 쿠나시르 섬과 이투루프 섬 역시 역사적으로 쿠릴 열도가 아닌 일본의 북방 영토에 포함된다며 이른바 북방 4도라 부르는 총 4개 섬의 반환을 요구하였습니다.

1956년 일소공동선언에서 평화조약 체결 후 소련은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군도를 일본에 반환하기로 합의했으나, 1960년 일본이 미국과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자 소련은 거세게 반발하며 영토 반환 체결을 거부하여 교섭은 결렬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에서도 사회-정치의 우경화가 심화됨에 따라 섬 두 개를 받을 게 아니라 아예 북방 4도를 전부 돌려받자는 여론이 커졌고, 결국 이것이 정론이 되었습니다.

2. 기나긴 협상과 파기의 번복과정

 

심지어 일본 공산당은 쿠릴 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유인 즉,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사할린을 포기하는 대가로 쿠릴 열도 전체의 일본 영유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일본 공산당이 집권한다고 가정한다면, 한일관계의 급개선과 러일관계의 끊임없는 악화라는 양날검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이 같은 상황은 미국에는 매우 큰 호재로 작용할 것입니다. 명분과는 별도로 홋카이도 자체가 교토, 도호쿠, 오키나와 등지와 더불어 일본에서 진보좌파 혁신계가 나름 선전하는 지방 중 하나이고 현지 중요 지지기반 중 하나가 구 가라후토를 비롯한 북방 실향민과 어민들이라 이 문제에 강경한 것으로 보입니다.

 

평화조약 체결이 결렬된 1960년대 이후 소련은 일본의 영토 반환 요구를 일관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이 붕괴되고 신생 러시아가 수립되자 양국 사이에 반환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1990년대는 신생 러시아 연방이 친서방적인 정책을 펼쳤고, 옐친 정부의 자본주의 전환 실패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이후로는 러시아의 경제적 사정이 다시 나아졌고, 1990년대 옐친의 친서방 정권이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러시아가 반서방 성향으로 차츰 기울면서 강경파들의 결사반대와 현지 거주민/어민들의 강한 반발로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사실 푸틴도 처음부터 결사 반대하던 것은 아니고 1990년대 후반 및 2001년 가진 러일 정상회담에서 2개 정도 돌려줄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가 거주민들 및 강경 극우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들으면서 강경책으로 돌아섰습니다. 알래스카를 러시아 땅이라고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정당 자유민주당은 이 당시 푸틴을 매국노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푸틴도 이가 갈리겠지만 당시 여론이 압도적으로 이런 극우파들을 옹호하니 결국 푸틴이 물러섰는데 극우단체들도 푸틴이 순순히 물러나고 일본에 물러서던 태도를 수정하자 푸틴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지지하였고 푸틴도 이런 극우들이랑 우호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때 일본에서 일부가 아닌 전체 반환을 요구했기에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루머는 결국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이 의사가 전해진 당시 일본 측도 거부 의사를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4개 섬 전체에 대한 욕심 또한 이유겠지만 이 당시부터 이미 일본은 한국과 독도, 중국과 센카쿠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 간 영토분쟁이 점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일부 반환'이라는 애매한 선례를 남기면 추후에 불리한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측에서 쿠릴 열도를 자국에 유리한 선례로 남기려면 최대한 러시아 측의 실효 지배 기간을 줄이면서 일본 측이 역사적인 권리를 인정받아 전체를 반환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푸틴 집권 후의 러시아도 소련 붕괴의 영향을 수습하여 사정이 나아지고 점차 우경화되면서 맹숭맹숭했던 태도를 버리고 네 개 중 하나도 못 돌려준다는 맞대응으로 강경하게 나왔고, 결국 4개 섬의 반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아베 총리가 20여 차례 넘게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진행하는 등 오래전부터 줄곧 크게 공을 들였음에도 북방영토 반환이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아서 아베 지지자들조차도 상당수가 북방영토에 한해선 아베 정권의 무능한 협상력을 비판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건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라 아베 총리 재임기간 동안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인정하며, 반대로 과거 아베 정권이 자신들이 나서면 북방영토 문제가 해결될 것 마냥 과장한 것들을 비판합니다.

현재 러시아는 계속해서 북방영토 반환을 놓고 일본과의 경제 원조 및 현지 개발 협상에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하길 원하는 영토 협상은 별로 하질 않고 경제 협력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영토 반환 협상을 제대로 벌이지도 않고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게 이 영토 협상은 전적으로 러시아가 협상 자리에 나와줘야 가능한 갑인 것이기에 을인 일본이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에 비협조적으로 나서면 역으로 협상 자체가 파투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이시하라 신타로는 러시아와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이 경기를 이김으로써 북방영토를 반환하는 토대로 삼자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경기는 일본이 이겼지만, 러시아에서는 도요타를 비롯한 일제 차량에 대한 방화 사건이 일어났고 러시아 극우파들의 기존 주장을 오히려 확고하게 만드는 역효과까지 부르고 말았습니다.


2004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푸틴은 일본이 4개 섬 중 이투루프 섬과 쿠나시르 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할 경우, 최남단의 시코탄과 하보마이 섬을 돌려줄 의향이 있음을 밝혔으나 이미 일본에서는 4개 섬 반환이 정론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도 국민적인 비난을 감수하며 러시아와 타협하지 못했고 분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꽁치잡이 원양어선들이 이 해역에서 조업하는 것을 두고 러시아 정부와 합의를 본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왜 자기들을 마다하느냐며 분노한 적이 있습니다. 또 2011년 5월 22일부터 독도영토수호대책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독도 문제와 비슷한 갈등을 겪고 있는 이 지역을 방문하자 일본에서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저 섬들에 조상의 무덤이 있는 일본인들이 성묘할 때 여권을 가지고 이 섬에 간 적도 있는데, 일본에서 이를 두고 큰 논란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일본 땅에 가는데 웬 여권이냐며 반발하던 극우들과, '그럼 조상님들 무덤을 그대로 놔두라는 거냐?'라면서 분노하던 일본인들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 이런 사정이 있는 일본인들을 특별히 여권 없이 입국하게 해 달라는 요구도 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저 섬에 조상을 모시고 있는 일본인들은 지금까지도 성묘 때마다 여권으로 입국하는 절차를 밟아가면서 방문합니다. 그래도 이런 문제는 러시아 정부도 어쩔 수 없었는지 이러한 사정이 있는 일본인들에 한하여 비자를 면제하기 시작했습니다.

 

3. 최근 동향

2010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소련-러시아의 최고 권력자로서는 처음으로 쿠릴 열도를 방문해 트위터에 감상까지 남기는 등, 센카쿠 열도(중국어로는 댜오위다오) 문제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일본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8일에는 동해에서 미일 합동 해상 훈련을 진행하던 중에 러시아 초계기가 나타나는 등, 이 지역 문제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은 사실상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2011년 2월 9일에 메드베데프는 한 발 더 나가 이 섬들에 최신 대함대공 미사일을 비롯하여 공격용 헬기 등 신형 무기들을 배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결정을 비난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응 방법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2011년 7월 일본의 극우 성향 국회의원들이 난데없이 한국의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쿠릴 열도를 방문한 것을 문제 삼아 자기네들도 울릉도를 방문한다고 해서 논란을 빚었습니다. 결국 자민당 소속 의원들이 8월 1일 입국하려다가 김포공항에서 입국 거부를 당해 들어오지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2012년 7월에는 메드베데프가 쿠릴 열도를 재차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도 일본 측에서는 반발했지만, 메드베데프는 홋카이도가 보이는 바위 언덕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등 대놓고 자국의 영토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2년 8월에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 소속 군함들이 쿠릴열도 지역을 방문했다.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2차 세계 대전 때 사망한 전몰 수병 추모 항해 차원으로 쿠릴 열도와 하바롭스크 지역 등을 24일 동안 항해하는데, 이는 5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실효 지배 강화전략이라고 주장합니다.

2013년 1월 모리 요시로 전 총리는 3개 섬(이투루프 제외)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물론 러시아는 무시했습니다.

2013년 4월 아베 신조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하고 푸틴 대통령과 함께 쿠릴 열도 반환 협상 재개를 선언하였습니다. 아베 총리는 이전에 모리 전 총리를 특사로 파견하였는데 모리 전 총리는 제한적 반환론 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도 4개 섬 반환을 포기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현재 2개 섬 반환 내지는 3개 섬 반환의 조건으로 일본이 러시아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3+1 가능성도 점친다고 일본에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극우파들이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며 반발하기에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모라토리엄 선언 당시 2개 돌려준다고 할 때도 현지인들이 결사반대하고 극우파들이 모스크바에서 반발 시위를 벌였으며, 당시 러시아 여론도 엄청 지지했음을 생각하면 뻔한 일입니다. 돈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러시아에선 쿠릴 열도를 일본에 준다면 연해주 지역도 중국의 막대한 돈을 받고 돌려줄 거냐는 비아냥까지 나오기에, 제아무리 푸틴이라고 해도 이런 반발을 무릅쓰면서 쿠릴 열도를 돌려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결국 이에 대한 답변인지 2014년 4월, 러시아 정부는 2016년까지 쿠릴 열도 남단의 섬 두 곳, 즉 이투루프와 쿠나시르에 150개 이상의 군사 시설을 신축하거나 재정비해 '완전한 군사 도시'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위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4개의 주요 섬들 중 가장 큰 두 섬입니다. 이곳에 강력한 군사거점을 구축하려는 러시아의 전략은 센카쿠 문제로 중국을 견제해 전력 재배치를 계획하는 일본에도 상당한 압력입니다.

2014년 9월 22일에는 이투루프 섬에서 신공항 준공식을 열었습니다.

2015년 7월, 러시아 올렉 코제먀코 사할린주 주지사 대행은 쿠릴 열도 개발사업에 일본이 참여하지 않으면 한국 등 다른 나라에 제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총 700억 루블(1조 4105억 원) 규모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참여하면 러시아의 쿠릴 열도 점유권을 인정하는 셈이니 일본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2015년 8월에는 드미트리 로고진 러시아 부총리가 쿠릴 방문에 항의하는 일본인들에게 할복하라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일본의 반발에 사과 성명은 커녕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행보를 미루어 보면 러시아 정부는 쿠릴 열도를 일부라도 일본에 넘겨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봅니다.

2016년에 러시아와 일본이 회담하였습니다. 일본은 쿠릴 열도의 2개 섬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러시아와 대규모 경제협력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베 신조는 2016년 10월 3일에 있었던 연설에서 쿠릴 4개 섬 반환은 변함없다고 밝힘으로써 2개를 먼저 반환한다는 것은 부인했습니다. 러시아 측도 2016년 10월 5일에 일본은 쿠릴 열도 4개 섬이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쿠릴 4개 섬은 러시아 주권의 영토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쿠릴 열도에 첨단 해안 미사일 시스템을 배치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은 쿠릴 4개 섬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무비자로 방문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측은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일본 측은 경제 협력에 만족하는 선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후, 아베 신조 총리는 북방 영토 문제 해결을 위해 2017년 상반기쯤에 러시아 방문을 희망했습니다.

2017년 들어서 4개 섬 가운데 이투루프, 쿠나시르, 시코탄 3개 섬을 잇는 940㎞ 길이 해저 광케이블을 설치하는 공사로 중국 화웨이는 사업 타당성 조사와 통신망 설계를 맡았고 일본에서 무척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러시아와 경협을 시도하면서 2017년 봄에 항공편운항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일본과 미국을 견제하면서 쿠릴 열도에 병력을 증강했으며, 러시아는 군 시설을 확충하는 등 군요새화하고 있고, 경제특구로 지정했습니다.

2017년 7월 12일에 러일 양국은 쿠릴 열도의 일부 지역과 홋카이도를 잇는 정개항로개설을 검토했습니다.

2017년 8월 23일에 러시아는 쿠릴 열도를 경제특구로 지정하자 일본 측이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2018년 말까지 통신망 사업의 조기 완료를 추진하고자 시도하자 일본 측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러시아는 쿠릴 열도에 지대함 미사일 배치를 추진했습니다.

2018년 2월 2일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총리가 이투루프 섬의 신공항을 군이 함께 쓸 수 있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이는 대규모 군 시설을 설치하겠다는 2014년 방침이 실행되는 것이고, 북방영토의 군비 증가와 러시아의 실효 지배를 강화할 수 있다고 일본 정부는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측은 이투루프 섬의 민간비행장을 민간·군 공용 비행장 목록에 포함시켰습니다.

러시아에서 쿠릴 열도에 미국 기업에서 투자한 발전소 건설 계획을 발표했는데 당연히 일본에서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2018년 11월 15일, 아베 총리는 싱가포르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처음으로 4개 섬 전체 반환이 아닌 2개 섬 우선 반환을 내세웠고 푸틴 역시 2개 섬 반환에 대한 가능성을 내비쳤다. 물론 단순히 2개 섬을 돌려주는 가능성만 비치고 주지 않은 채 경제적 협력만 받아 냈습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18일에 크렘린궁 대변인은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협상에서 1956년 소·일 공동선언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 곧 자동으로 일부 러시아 영토의 일본 반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리고 러시아 측은 2개 섬을 돌려주더라도 미군 주둔이 없다는 확실한 약속이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아베 정권은 미군 주둔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러시아 측은 냉전시대 말기에 미국이 당시 소련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동쪽으로 확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이 약속을 깨뜨린 사례를 거론하며 아베 일본 총리가 미군 기지를 두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약속은 현실적인 것이 못 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극우들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러시아령이 되면서 이들 섬 지역으로 이주, 정착한 러시아인 이주민들의 분노 어린 반발도 골칫거리입니다. 2개 섬을 넘겨준다면 러시아에 대한 매국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하는 분위기입니다.

러시아는 개발이 늦은 시코탄 섬을 개발하는 등 영유권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크렘린은 러일 간 협상 의제는 쿠릴 섬 반환이 아니라 평화조약 체결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을 러시아는 2022년부터 경제특구로 지정되면서 관세 면제되고, 법인세나 부동산세 등도 최대 20년간 면제한다고 합니다.

4. 소감

힘의 균형추에 따라서 영토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어 왔던 쿠릴열도 분쟁, 일본은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 쿠릴열도뿐 만 아니라 독도까지 자기네 영토라고 버젓이 올려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언제든 일본의 힘의 팽창에 따라서 쿠릴열도 뿐 아니라, 현재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 쿠릴열도 분쟁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역시 자주권의 강화만이 영토를 지켜나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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