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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 조선을 세상에 알리다

16세기 조선
16세기 조선

"하멜, 본명 얀 얀센 하멜. 그는 1630년 네덜란드의 고릴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이었으며 300휠던짜리 집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 인물이다.

고향 호린험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후 1650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당시 기준 어마어마한 규모의 회사로 주식회사의 개념을 만든 곳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유럽의 격동적인 시대를 경험하며 자랐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무역과 탐험의 중심지로 동인도회사의 부상은 하멜의 인생을 크게 바꾸게 됩니다.

1650년대에 하멜은 동인도회사에 들어가 선원이 되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단순한 무역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유럽의 경제와 군사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조직이었습니다.

하멜은 이 회사를 통해 동양으로 향하는 항해에 참여하게 됩니다.

" 하멜의 이동 경로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로 호크호가 제주도 산방산앞 바다에 표류해온 것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 때인 1653년이었다. 심한 풍랑으로 배는 크게 부서지고 선원들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8명이 탈출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으며 돌아간 선원 중 헨드릭 하멜은 조선에서 살았던 동안의 삶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책이 『하멜표류기』입니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 조선으로 오게 된 경위와 조선에서의 삶을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16세기 네델란드
16세기 네델란드

1653년 1월 하멜 일행은 포겔 스트루이스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6월에 자바 섬의 바다비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스페로 호크호를 타고 타이완으로 향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명령에 따라 신임 총독을 임지로 데려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타이완에 도착한 그들에게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7월 말 나가사키를 향해 출항한 스페로 호크호는 심한 풍랑으로 보름이 다 되도록 바다 위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표류하던 그들이 절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한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으며 그것이 제주도 남해안이었습니다.

정박하는 과정에도 심한 풍랑이 몰아쳐 스페로 호크호는 난파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선원 64명 가운데 28명은 목숨을 잃고 36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은 제주도와 서울, 전라도 등지에서 억류 생활을 했습니다 하멜은 "조선인들은 우리를 괴물로 여겼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동시에 조선인들은 하멜의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를 신기해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조선은 하멜 일행 외에 다른 서양인을 보고는 '면철' 즉 '녹슨 철빛 얼굴'을 가졌다고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즉, 서양인은 붉은 피부를 지녔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하멜 일행은 화젯거리였고 너도나도 구경하러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선원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선원

이건 하멜 일행의 생김새가 사람이 아니라 괴물 같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데,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의 생김새를 희화화하며 이야깃거리로 삼았다고 합니다

 

괴물 취급받던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을 느낀 사찰의 승려들이 그들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승려들과 가장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집니다.

 

그 외에 그들은 대갓집에 불려다니며 네덜란드 노래와 춤을 보이는 일 따위를 해 식량을 얻었고 대갓집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이랍시고 속여서 이들을 불러내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그의 동료 두 명이 군졸로 있다가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지나가는 길에 무단으로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청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헨드릭 얀스와 포수인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자들로 각각 '남이안'과 '남북산'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헨드릭 얀스 보스가 호소하는 데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말을 모르는 청나라 사신들이 "뭐야, 이것들은?" 하고 멀뚱히 있자 사태가 이상함을 느낀 헨드릭 얀스는 잽싸게 튀어버렸으나 곧 체포되었습니다

16세기 조선
16세기 조선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명의 범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에 한 놈은 현장에서 잡히고, 한 놈은 달아났지만 체포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나라 사신들에 대해 하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먼저 청나라 사신들을 '타르타르'(혹은 타타르)라 적었습니다

하멜은 청나라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과 교류가 잦은 편이라 비교적 여러 유목민족들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 몽골족등으로 다르게 불렀지만 유럽은 유목민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서 구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유럽 동부에서 주로 활동하는 유목민족들을 그냥 싸잡아서 '타타르'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가 몽골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타타르 러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청나라는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유럽인들은 중국이 타타르의 지배를 받는다고 여긴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또 하멜에 따르면 이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이 불안해했다고 서술했으며 청나라 사신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보고 스페르베르 호가 표류한 후 조선이 취한 30만냥에 달하는 재물을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할까봐 불안해했다고 합니다

16세기 제주도
16세기 제주도

조선 조정에서는 무엇보다 화란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조선에서 조직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청나라에서 의심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고 저술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도 비슷한 맥락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결국 조정에서 청나라 사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먹여 이 일을 무마시키고 이들은 투옥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낙심한 나머지 음식을 거부하다 곧 죽었다고 하고 하멜은 이들이 참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리만 남겨놓았습니다

어쨌든 탈출 소동은 조정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하멜 일행을 몹시 불순하고 위험한 놈들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33명'에게 전부 곤장 50대를 선고하여 매운 맛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처음에 표류한 사람은 36명인데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 배를 타고 전라도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파울루스란 사람이 죽어 35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효종이 이들은 도둑질을 하러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여 장형은 피했지만 곧이어 그해 8월에 청나라 사신이 또 오게 되면서 조정엔 비상이 걸렸습니다

 

조정에서는 이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하여 조선말을 잘하는 세 명에게 또 남만인들이 상륙했으니 통역으로 차출하라고 거짓 지시를 내려 전라도 해안으로 보내 사실상의 인질로 삼고 하멜 일행과 청나라 사신들과의 대화 매개체를 박탈했습니다

16세기 조선
16세기 조선

청나라 사신들은 곧 돌아갔지만 조정에선 이들을 마땅히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매우 거셌습니다

 

그들의 직속 상관인 이완은 이들을 조선 병사들과의 결투를 붙여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면 외국인들을 무고하게 죽였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거라고 하는등 아예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방법을 주장하며 이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고, 대다수의 조신들도 그들을 죽일 것을 청했습니다.

 

이때의 상황이 심각하여 벨테브레이는 하멜에게 당신들이 만약 앞으로 3일만 더 살 수 있으면 살아남을 것이라 전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앞으로 3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되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하멜 일행은 때마침 그들 숙소를 지나는 인평대군(효종의 동생)에게 그들의 사정을 호소하며 살려줄 것을 간청했고 동정심이 든 인평대군과 효종은 그들을 강력히 변호하며 전라병영으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벌을 마무리지었습니다

 

하멜도 기록에 국왕과 국왕의 동생 덕에 우린 목숨을 건졌다고 저술했습니다.

이때 일행 중 일부는 조선인 처까지 구해 자식까지 낳았다고 추정됩니다

사학자들은 그들의 배우자가 무당이나 과부 같은 소외된 여자들일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들은 남만인이라 모두 '남(南)씨' 성을 하사 받았습니다

하멜의 조선 이름은 '남하면'이었습니다

일행 중에는 자식이 있었다고 하며 '병영 남씨'라고 해서 현재도 그 후손들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의령 남씨에 별보로 편입된 상태라는 얘기도 있으며 남일도 병영 남씨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처음엔 전라병영에서 7년 가량 지냈으며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는 당시 전라병영성이 복원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병영성 동문 맞은 편에 하멜 기념관을 지어 역사문화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멜은 전라병영에 도착한 직후 성벽과 돌담을 쌓는 노역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인근 민가에는 이들 일행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네덜란드 스타일의 돌담이 남아있습니다

16세기 조선
16세기 조선

강진군은 매년 4월 중순에 강진 전라병영성 축제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현종때 찾아온 극심한 흉년으로 나주, 순천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이배했는데 하멜은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인계받은 전라 좌수사 이도빈은 네덜란드인들을 후히 대접해주며 한 달에 2번씩 있는 점호를 빼곤 모든 노역을 면해주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자주 연회를 베풀며 "확 일본으로 배타고 달아나는 게 어떻겠냐" 고 탈출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멜도 그의 말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하멜은 "좋은 사람(이도빈 좌수사)을 부임시켜 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라는 기록도 남겼습니다

이도빈은 하멜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두루 아끼는 사람이었는지 좌수사시절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을 정도이며, 훗날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전라병영에서 지내는 동안 근처의 승려들과 아주 잘 지냈다고 합니다

하멜표류기
하멜표류기

유교 사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승려들이 이역만리에서 괴물 취급 당하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심과 동병상련을 느껴서 자주 교류하고 네덜란드의 얘기도 듣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전라 좌수사가 총 네번 교체되어 하멜은 다섯명의 수사를 겪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이도빈과 이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좌수사인 정영을 빼고는 네덜란드 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도빈이 물러난 이후, 부임한 자는 네덜란드인들을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임으로 온 사람도 네덜란드 인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은 마찬가지라서 새끼줄을 꼬아내라는등 요구를 했습니다 하멜 일행은 우리는 새끼줄을 꼴 줄 모른다고 하여 수사가 부여한 노역을 회피하는 한편 저 자는 우리를 톡톡 털어먹으려고 작정한 자이며 우릴 못살게 굴 것이 틀림없다며 탈출을 결심하게 됩니다

하멜표류기
하멜표류기

마지막 좌수사 정영의 경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자 인조가 곤룡포를 찢어 상처를 감싸줬다는 일화가 있는 인물로 하멜이 도망간 일로 인해 큰 문책을 받지는 않았는지 전라 좌수사 이후 경상 우병사 등의 직위가 계속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사들이 딱히 인종차별을 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뒷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하멜 일행을 쥐어짜내려고 한 것이 문제일 뿐 뇌물로 관직을 사고 백성들을 수탈해 그 비용을 충당하는 세태는 조선시대 관료제도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했습니다

하멜
하멜

 

그러다보니 하멜 일행에게 잘 대해준 이도빈과 정영은 맡은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던 반면 하멜 일행을 괴롭힌 관료들은 전형적인 탐관오리라 일반 백성들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탈출 계획은 매우 치밀했는데 그들은 우선 배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친해진 이웃사람의 이름으로 동네 어부의 어선을 사게 되었는데 이 동네 어부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거래를 무르려고 하자 원래 가격의 3배의 가격을 더 주어 간신히 배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년 동안 이 배를 이용해 바닷길로 장사를 하며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고 1666년 드디어 8명의 일행들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때 모두 온 것은 아니라서 8명은 조선에 그대로 남은 상태였습니다.

일본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들이 선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자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으로 인계했고, 하멜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강력히 요청하면 남은 8명의 사람들도 모두 송환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일본을 통해 조선에 송환을 요구했고 일본도 네덜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조선에서도 이득을 얻어낼 기회라고 판단하여 조선에 송환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요청 이전에 물밑 접촉이 벌어졌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물밑 접촉에 이르러서야 조선은 네덜란드인 8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곧 조정에 보고 되었고 사건이 벌어지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지방관들에게 탈출 사실이 보고 되지 않고 일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에 조정은 분개하고 조사를 지시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보라도 더 얻어내려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심문했다고 합니다

나가사키 부교가 당시 하멜에게 던진 질문은 모두 54가지로 "하멜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로부터 시작해서 난파된 지점, 하멜이 타고 있었던 배의 대포 수, 배의 화물, 한양으로 압송된 연유 등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 묻고는 더 나아가서 조선의 산물, 군사장비, 군함, 종교, 인삼 등 세세한 정보들까지 체계적으로 질문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이 14년 동안 조선에 머무르며 보고 들은 정보를 단 하루만에 캐냈습니다

또한 조선에는 그들을 송환해주는 대가로 통상에 관한 이익을 더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본 측이 과거 박연의 송환을 거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끝나버립니다

또 남은 8명에 대한 송환은 조선으로서도 이들을 데리고 있을 명분이 빈약해서 결국 네덜란드로 송환하기로 했습니다 돌려보낼 때 중간 집결지에서 좋은 옷을 입혀 보내야 조선의 체면이 안 깎인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결국 이들은 옷을 지급받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하멜 일행은 이들이 송환되기 전에 이미 일본을 떠났는데 13년간의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하멜표류기》입니다

동인도 회사는 13년만에 돌아온 이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기 싫어서 항해중 실종 당일부터는 근무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대신 2년치의 임금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은 8명이 송환될 때 이미 죽었다고 해서 돌아오지 못했는데 사실은 살아있는데 송환을 거부했고 이를 받아들인 나머지 일행들이 입을 맞춰 계속 조선에 남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멜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온 이후로도 선원 일을 계속해 서인도 제도에 갔다왔다는 기록과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불명확합니다 참고로 하멜과 그 일행들이 청구했던 임금의 경우, 처음에 신청한 그룹에게는 배가 침몰하면 일 안한 걸로 간주한다면서 2년치의 봉급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주고 씹어버렸습니다 반면 하멜 등 7명의 2차 그룹에게는 13년치의 봉급을 지급했습니다

 

이유는 《하멜 표류기》가 너무 뜨면서 동인도 회사에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그랬다고 합니다

하멜 표류기》는 불티나게 팔려 순식간에 불역본, 독역본, 영역본이 나왔으며 17세기에 나온 책이 1885년까지 계속 판을 찍어냈다고 합니다.

이후 《하멜 표류기》는 조선에 대한 지리, 언어, 풍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전까지 서양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악어나 괴조가 사는 아프리카 같은 신비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이랬습니다

 

인터넷도 TV도 없던 17세기에는 동양에 대한 온갖 판타지가 난무했으며 그러다가 이 책을 통해 조선이 더 자세히 알려졌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하멜 표류기》를 보고 일본과의 교역보다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은 네덜란드에서 사온 물건을 조선에 팔면서 이익을 남기고 있었으며 그래서 "코리아 호"라는 배까지 만들어 직접 무역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 이익을 남기기위해 "네덜란드가 직접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시도할 경우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압박하여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은 일본의 방해를 피할 꼼수도 부릴 겸,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조선 상인이나 사신들을 대상으로 간접 무역을 했다고 합니다. 하멜 표류기가 서구 중심적이며, 조선에서 잘해줬는데도 악담을 늘어놓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는 하멜 표류기에 "조선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며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벨테브레가 말하길 조선인들은 겁이 많아 병자호란 때 싸워 죽은 이보다 스스로 목 매달아 죽은 이가 많았다고 했다" "피를 싫어해서 전투 중 누군가가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만다." "조선인들은 자살하는 것을 수치스런 행동으로 여기지 않으며 필요에 의해 그렇게 한다고 말하며 자살자를 가엾게 여긴다." "조선인은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선 안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라고 여긴다." 등 현대 한국인이 듣기 거북한 팩트폭력 발언이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이니 평등이니 하는 개념도 희박한 시대인 17세기에 서양인이 서구 중심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조선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억류한 나라이기 때문에 좋은 감정이 들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첫 탈출 시도 이전의 대접은 융숭했고, 이후로도 그들을 챙겨주고 위해 준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아무리 잘 대해준다 한들 고향에 가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데 22세부터 36세가 되도록 14년 동안이나 고향에 못 돌아가게 강제로 막고 종국에는 각종 노역에 부여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험난한 삶을 살게 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가지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1760년 부터 1839년까지 생존했던 조선인 작가 송행은 역사상의 평론에서 네덜란드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위의 하멜의 증언은 고의적인 왜곡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난파선의 생존자들 중에서는 포에 대한 전문가도 몇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에 30문 정도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모두 바퀴가 달려있어서 쉽게 운반이 가능했으며 포가 한발 발사되면 대포는 배 뒤쪽까지 굴렀습니다 그래서 뒤로 반동하는 힘이 가해져 몸체가 쪼개지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그들의 소총 역시 정교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철끝을 부싯돌이 내려치는 원리로 불꽃을 일으켜 화약이 발사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걸쇠를 잠그고 끄느 용수철 작용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실제로 하멜은 조선에 처와 자식이 있었는데 "조선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생겼다"는 불리한 이야기는 자신이 저술한 하멜 표류기에서는 모두 제외되어 있지만 하멜과 함께 탈출한 다른 선원 및 지인들이 기록하거나 문답한 내용에는 그들이 조선에서 처와 자식들을 두었다는 기록들이 실제로 나옵니다 사학자들은 그들의 조선인 배우자가 과부나 무당 같이 소외된 여성들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아무튼 조선시대의 실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한 하멜표류기는 당시의 생활상을 고증하는데 적지않은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립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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