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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땅에서 뿌리내린 한국인들 그들은 왜 떠났고 무엇을 꿈꿨나?

미지의 땅에서 뿌리내린 한국인들
미지의 땅에서 뿌리내린 한국인들

 

한국의 이민사는 단순히 사람들의 이동을 넘어, 한 민족이 새로운 땅에서 생존하고 적응하며 정체성을 이어온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의 격변 속에서 시작된 첫 이민 물결은 일제강점기의 억압을 피해, 더 나은 삶과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들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희망을 품고 새로운 터전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들이 떠나야만 했던 이유와 꿈꿨던 미래는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역사입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인의 이민사가 담고 있는 의미와 그들의 도전과 성취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 이민의 시작은 주로 일본과 만주, 하와이로의 이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조선 후기, 극심한 기근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선 이민자들은 생계를 위해 낯선 땅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특히 하와이로 이주한 한국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혹독한 노동을 감내하며 가족과 조국을 위한 꿈을 키웠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더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적 억압과 수탈이 극에 달하며,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해외로 향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만주와 러시아, 그리고 중국 내 한인 거주지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한국인들의 열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과 경제적 재건기를 거치며 한국인의 이민은 또 한 번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1960년대 이후에는 경제 협력과 노동력 수출을 통해 독일, 미국, 남미 등지로의 이민이 활발해졌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된 이민자들, 미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선 한인들은 낯선 환경에서도 강인한 의지로 자리 잡으며 한인사회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이민사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이동만이 아닙니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학문, 예술, 비즈니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와 교류하며, 자신만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세대를 넘어 계승해야 할 민족적 정체성과 이주자들의 애환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이민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도전과 성취,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함께 모색해보려 합니다.

 

1.미국

미국
미국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03년 1월 일단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초기한인이민에서 한인들을 하와이로 끌어들인 흡인요인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값싼 노동력에 대한 필요였습니다

1830년대부터 하와이에서 대규모의 노동집약적인 사탕수수 농장을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노동자로서 모집되었습니다

 

한인에 앞서 중국인들은 1852년부터 하와이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하였는데 1882년 ‘중국인 배제법령(Chinese Exclusion Act)’에 의해 그들의 이민이 중지된 후에는 일본인들이 대용 노동자로서 1885년부터 대규모로 이민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1990년경에는 전체 하와이 노동자들의 80%를 차지하면서 보다 높은 임금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백인 농장주들은 한국, 필리핀, 포르투갈에서 이민자들을 대용 노동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일본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습니다

 

결국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한편으로는 값싼 노동력으로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의 파업 파괴자(strike breakers)로서 유입된 것입니다

 

101명의 한인들을 실은 최초의 이민선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9% 가량만이 여성들이었으며 7% 가량이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구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자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체류자(sojourner)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결혼 연령의 여성들이 태부족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910년부터 한국에서 신부들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사진만을 보고 결혼한다하여 ‘사진신부’라고 불렸습니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한인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그리고 115명의 신부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총각들만 있던 한인 사회가 신부들의 유입으로 가정을 이루게 되자 2세들이 태어나고 가족 중심의 사회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면에서도 한인들은 사탕수수 노동자 또는 도시 주변 일용 노동자로부터 벗어나 보다 장기적인 사업 분야(예를 들어 자영업, 쌀농사, 고구마 농사 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미국 본토의 철도 건설 현장이나 과수원들에서 일하면 하와이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903년부터 1915년까지 총 1,087명의 한인들이 본토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진신부는 한인사회에 반드시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연령차가 평균 14년이 되기 때문에 한인 부부간에 높은 이혼율을 유발하였으며 부인들이 일찍 과부가 되는 문제점 등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초기한인이민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류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미국으로 건너 간 정치 망명자들입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541명가량의 학생들이 신분으로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사회의 지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부상하였고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 한인 이민 사회는 1945년 조선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하와이에는 6,500명 그리고 미국 본토(특별히 캘리포니아)에 3,000명가량이 미국 주류 사회와는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였습니다

 

광복 이후 미국으로의 이민은 주한미군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정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약 4만명의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주한미군은 많은 수의 우리나라 여성들과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한국사회는 국제결혼에 대한 편견이 심했고 이에 따라 많은 한인 여성들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가량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군의 부인으로 이민 간 한인 여성들의 수는 10만명에 달했습니다

1954년 전쟁고아 문제 해결을 위해 해외입양이 시작되었으며 입양인의 수는 전체 재미한인(200만명)의 5%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이들에 앞선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일부 대도시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던 것에 반해 전후의 국제결혼 여성들이나 입양인들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미국인 공동체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한인사회와 미국 주류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외롭고 고립적인 생활을 하였으나 ‘해외입양인연대’, ‘한국인ㆍ미국인 아내협회’같은 단체를 통해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한인 이민의 또 다른 흐름은 유학생들입니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000명가량의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 앉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활짝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1965년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개정된 이민법에 의해 유학생, 객원 간호사와 의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 온 한인들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고 이들이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의 한인 이민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들은 후에 국제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함께 한국에 남은 가족을 초청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한인 이민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70년 초부터 본 궤도에 올라서 연 30,000명 가량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는 연 35,000명의 한인들이 이민을 가서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간 3대 이민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인 이민은 1987년의 35,849명을 기점으로 해서 줄어들기 시작해서 1999년에는 단지 12,301명만이 이민을 와서 1972년 이후로 최저점을 기록하였습니다

1991년부터 1998년 사이에는 136,651명의 한인이 이민을 왔는데 이 규모는 동일 기간에 미국으로 이민 온 총 7,605,068명의 단지 1.8%에 해당하며 한국은 14번째로 미국으로 이민자를 많이 보내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 한인 이민자수는 15,214명으로 증가하였으나 이들 중 반수 가량만이 처음부터 이민을 온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비영주 목적으로 미국에 왔다가 후에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들입니다

최근에는 처음부터 이민을 오는 사람들은 연 8,000명에 머물고 있습니다

1948년부터 2000년 사이에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들은 총 806,414명에 이릅니다

1970년대 이후로 증가하기 시작한 이민과 2세들의 출생으로 인해 재미한인 인구는 1950년의 10,000명에서 1970년의 69,150명, 1980년의 357,393명 그리고 1990년에는 798,849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2000년 인구센서스 통계에 따르면 한인 인구는 1,076,872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1990년에 비교해서 35% 증가한 것입니다

1백만 명이 넘는 한인 인구는 미국 전체 인구 281,422,000명의 0.38%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1965년 후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은 그 이전의 한인 이민자들과 크게 구별되는 인구학적, 사회경제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최근 한인 이민자들은 핵가족이 단위가 되어서 이민을 갔고 이민 후에도 가족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미국사회에서의 경제적 적응이 훨씬 용이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대도시, 대졸, 전문직 또는 화이트칼라 직종 출신의 신중간계층 성원들이었습니다

대학 교육과 직장을 찾기 위해서 지방에서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로 이동을 하였고 부모 세대에 비해서 훨씬 높은 수입과 권위를 갖는 직업을 갖는 등 수직적 신분 상승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고국에서 이미 서울과 같은 대도시 자본주의 사회경제 체제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이들은 미국의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대도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용이하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1965년 이후로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의 계층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산층 출신이 압도적이었는데 이러한 양상은 1970년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점차 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1965년 전체 한인들 중 미국으로 입국할 때 세관에서 직업을 보고한 사람들 가운데 84%는 한국에서 전문직, 관리직, 판매직, 사무직 등과 같은 화이트칼라 직종에 종사하였었는데 이러한 비율은 1970년에는 81% 그리고 1975년에는 65%로 하락하였습니다

 

반면 한국에서 노동직, 기능직, 서비스직, 농업 등의 블루칼라 직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전체 한인들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로 증가하여서 1980년대 초에는 화이트칼라 출신의 한인 이민 비슷한 비율로 미국에 이민 가고 있습니다

 

위와 같이 예전과는 달리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상이한 동기를 가지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이민자들이 늘면서 한인 이민사회는 더욱 이질적이고 복잡해졌고 한인 이민사회의 문제들도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2.

캐나다

미국으로의 초기 한인이민과 같이 캐나다로의 초기 이민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민의 산파역할을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구한말 선교사들은 종교 외에도 교육, 의료 등의 사업을 통해 민심을 얻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자연스레 신도가 늘어나면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목회와 선교역할을 분담하기 위해 조선인을 목회자로 양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망하고 젊은 조선인들을 캐나다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캐나다 이주의 시작이었습니다

1935년과 1946년 사이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 등으로 유학생이 끊어졌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캐나다 교회는 전후 복구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유학 후원을 재개했고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캐나다로 오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정착한 한인들은 주로 목사, 의사, 학자들이 대부분이라 1960년대 후반부터 입국하기 시작한 ‘거주자’ 이민자들과는 특성이 매우 달랐습니다

 

1965년 당시 캐나다의 한인 인구는 70여 명으로 추정되고 한인사회는 토론토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1967년에 캐나다로의 이민문호가 한인에게 열리면서 한국에서 직접 이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한인의 공식적인 이민은 캐나다 정부가 이민백서에 따라 이민을 지역별 할당제(quarter system)에서 점수제(merit system)로 바꾸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시아에서는 홍콩과 일본만이 이민쿼터를 받았었습니다 한인 이민은 1973년에 서울에 주한 캐나다 대사관이 개설되면서 가속화되었고

1976년 캐나다이민법의 개정으로 삼촌, 형제등 친척이민이 단절되기까지 한인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한인 인구는 9,449명으로 급증하였고, 특히 1974년에는 4,331명이 이민을 와서 단일 년도로는 최고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후, 1980년부터 1991년까지 12년간 캐나다에 이민 온 한인수는 2만 명에 육박합니다

캐나다에 이민 온 한인들은 대부분 온타리오 지역, 특히 토론토로 정착했습니다

그 이유는 온타리오주가 이민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는 산업시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밴쿠버와 같은 서부 도시로 이민을 온 사람도 직업과 사업기회를 찾아 토론토 지역으로 재이주하는 경우가 늘어서 앞으로도 토론토는 캐나다 한인사회의 중심지로 성장할 전망입니다

 

1997년 말의 한국의 외환위기는 국내의 고용불안정을 심화시키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고용에 불안감을 느낀 30대들이 해외이민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1999년에 5,267명이 취업이민으로 떠났고 2000년에는 그 수가 8,369명으로 증가했습니다

대졸 학력 이상을 주 대상으로 하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로의 취업비자 발급 건수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한인사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인구집단은 한국에서 조기유학 또는 영어연수 목적으로 방문하여 단기 체류하는 조기유학생과 언어연수생입니다

1994년 5월 한국과 캐나다 사이에 한국인에 대한 입국사증면제가 발효되면서 미국에 비교해서 비교적 입국이 자유롭고 교육비와 생활비가 저렴한 캐나다로 유학과 어학연수 목적으로 많은 수의 학생들이 입국하여 또 다른 한인사회를 구성하였습니다

 

3.중남미

중남미 이민
중남미 이민

 

외교통상부의 2011년 재외한인 현황에 따르면 중남미 국가 중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들은 브라질(50,773명), 아르헨티나(22,354명), 멕시코(11,800명), 과테말라(12,918명), 파라과이(5,205명)입니다

 

중남미로의 한인 이민은 1905년 멕시코 이민을 시작으로 1921년 쿠바로 재이주한 제1기 (1903년부터 1921년), 1920년대 소수의 일본국적 조선인(장승호와 김수조 등)들이 일본인 이민자들에 섞여서 이민 온 것과 1956년에 57명의 반공 포로들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제2기(1922년부터 1956년까지), 1963년 브라질로의 농업이민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집단 이민이 시작된 제3기(1963년부터 1971년까지), 1972년 브라질 정부가 한인 이민 억제 정책을 시작하게 되어 공식이민이 중단되고

 

대신 서독에서 광부 또는 간호원으로 일했거나 베트남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들이 계약이 만료된 후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남미 국가로 불법 입국하여 체류한 제4기(1972년부터 1980년까지), 그리고 1980년 이후 가족초청, 투자이민 등으로 중남미 한인사회가 새로운 성장 단계를 맞게 된 제5기(1981년부터 현재까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1기의 이민은 1905년 4월 4일에 1,033명의 한인들이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가게 된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멕시코의 메리다 지역에서 20여 개의 에네켄 농장에 분산되어 계약노동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계약노동자이지 실제로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4년 동안 해야 했습니다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 이들은 기대했던 돈을 모으지 못했고 대부분 실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40명이 농장을 탈출했고 49명이 사망했습니다

 

소수의 탈출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조선으로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멕시코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갔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멕시코 한인들은 1921년 3월에 290여 명이 쿠바로 재이주를 시도했습니다

이들을 쿠바로 끌어들인 것은 외국인 노동력에 대한 수요였습니다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쿠바에서는 미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개척하며 사탕수수 산업이 활성화됐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쿠바 농업의 전성기였던 1902년과 1920년 사이에 중국, 유럽, 남미 국가들로부터 받아들인 외국인 노동자의 수는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1921년 멕시코로부터 쿠바로 이주한 한인들도 이런 외국인 노동자의 일부였습니다

 

288명의 한인들이 1921년 3월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떠나 쿠바 라스 뚜나스 지방의 마나티 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국제설탕가격이 폭락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일자리가 줄고 임금도 크게 하락했습니다

결국 한인들은 처음에 의도했던 농장에서 일하지 못하고 주변 지역에서 잡역 노동자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마딴사스 지방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엘 볼로 농장에서 한인들은 집성촌을 이루면서 쿠바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쿠바 한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갔습니다

1933년에 집권한 바티스타의 혁명 정부는 1930년대의 경제공황을 극복하고자 자국의 중산층과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보호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을 금지하는 노동 정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1946년 그라우 산 마르틴 정부가 국수주의 정책을 취하자 노동 정치 상황을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인들은 쿠바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1940년에 헌법이 개정되어 쿠바 태생이 아닌 외국인도 국적 취득을 할 수 있게 되어 1946년부터 많은 한인들이 쿠바 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더 이상 모국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들어오지 않고 쿠바에 남아 있는 한인들은 쿠바 국적을 취득하면서 현지 사회문화에 빠르게 동화가 진행됐습니다 1951년 당시 쿠바의 한인 인구는 400여명이었는데, 이 중 쿠바 태생이 250여 명이었습니다 이민 2, 3세가 증가하고 이들은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강하게 갖지 않았기 때문에 한인 조직들은 약화되었습니다

 

더욱이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남한과 미국 한인회와의 교류가 단절되면서 쿠바 한인들은 한민족으로서의 의식과 생활문화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제2기의 이민은 정작 이민이라고 보기에는 규모가 작아서 본격적으로 이민이 시작된 제3기의 디딤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20년대에 일본 국적으로 8명의 한인들이 브라질에 이민 왔습니다

 

이 중에서 김수조는 1920년대 후반에 일본의 ‘모범 케이스’ 이민으로 온 4명의 독신자 중의 한 명인데 1963년 브라질로의 집단 농업이민을 중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956년에는 한국전쟁 중 유엔군 포로로 인도에서 수용되었던 반공 포로들이 중립국으로 브라질(50명)과 아르헨티나(7명)을 선택하여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주한 한인들은 서로 교류하지 않고 현지 사회에 묻혀 생활했다고 합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 남미의 한인 이민은 본 궤도에 올랐습니다

이 시기의 농업이민은 한국 정부에 의한 최초의 집단 이민이었습니다

우리정부는 1962년에 해외이주법을 제정하여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냄으로써 인구압력을 줄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은 광대한 농토를 개발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1960년대의 농업이민은 송출국과 수용국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시작된 기획이민이었습니다.

1962년 12월 18일 제1차 브라질 이민단이 부산항을 출발하여 다음 해 2월 12일 산토스항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브라질로의 이민은 1966년 5차 이민단까지 이어져서 총 193세대가 입국했습니다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은 1962년에 리오네그로 주 라마르께 지역의 400헥타르에 달하는 개간지를 무상 임대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65년 8월 17일 라마르께 영농 이민단 1진 13세대 78명이 부산항을 출발하여 1965년 10월 1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습니다

파라과이 농업이민은 한국의 이민 사업가 이관복이 당시 파라과이 정부의 실권자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150여명의 이주 허가를 받아내어 시작됐습니다

 

1965년 2월 17일 농업 이민 1진 30세대 95명이 부산항을 출발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항을 경유하여 같은 해 4월 22일 아순시온 항에 도착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농업이민자들은 원래 배정되었던 개간지에 도착해서는 그곳에서 도저히 개간은 커녕 생활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변변한 농기구조차 갖추지 못했고 개미 떼와 독충과 싸우며 주거시설을 마련하고 끼니를 마련하느라 고군분투를 해야 했으며 더욱이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농업 경험과 기술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결국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아순시오과 같은 대도시로 재이주했다.

대도시로 이주한 한인들은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행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물건들을 팔다가 나중에는 현지에서 물건을 사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판매를 하였습니다

벤데라고 불리던 행상 다음에 한인들의 생계거리로 시작한 것이 봉제업입니다

 

처음에는 동네 바느질처럼 하청 봉제를 받아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 행상과 동반되면서 자체 생산과 판매 구조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신규 한인 이민자들이 자본과 기술력을 가지고 들어와 한인 의류업에 질적 성장이 있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전문 의류 상가로의 진출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한인 의류산업에서 원단 제조, 봉제, 도매업과 소매업이 모두 한인들이 담당하고 있어서 수직적 및 수평적 통합을 이뤘고 이것이 한인 의류사업의 경쟁력이 되었습니다

 

브라질에서도 한인 상인들이 브라질 의류 생산의 40%를 차지하며 브라질 의류산업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기는 멕시코가 중남미 한인사회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1987년 멕시코 정부가 무역 자유화를 실시하고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에게 관세 혜택을 주면서 멕시코의 한인사회는 급증하였습니다 멕시코 대우 지사에 파견되었다가 독립한 소수의 기업가들이 섬유 무역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에콰도르에서 이주한 한인 이민자들이 자본과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의류업을 새롭게 발전시켰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의 저가 물건인 의류, 신발, 액세서리 등을 수입하는 소규모 무역이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대 전반기는 멕시코 한인사회의 경제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의 경제 위기가 가속화되자 한인들이 멕시코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들은 현지에서 원단 수입과 의료 도·소매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멕시코에 도착해서 이들은 의류 도매업을 시작했고 식당과 식품점과 같은 서비스 업종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2003년부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부활하면서 멕시코로 유입되는 한인들의 수는 줄어들고 대신 유출하는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중남미로의 한인 이민은 비록 소규모이겠지만 증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멕시코가 미국과 맺은 북미자유무협협정, 한국과 칠레 사이의 FTA 협정, 2000년대 중반 이후 중남미 국가들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의 호전 등의 조건들은 한국인들을 중남미 국가들로 유인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이민 1.5세와 2세들이 현지 국가의 주류사회로 진출하면서 한인사회가 보다 안정된 이민공동체로 정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낙관적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남미 한인사회는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남미 국가들을 정착지로 여기지 않고 미국과 같이 안정된 선진국으로 재이주하기 위한 경유지로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남미 한인사회가 현지사회에서 존경받는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현지사회를 자신들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현지사회의 발전을 위해 참여하고 기여함이 중요합니다

 

4.중국

중국 이민
중국 이민

 

중국에서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재중한인 모태는 19세기 중엽부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860년대와 1870년대 사이에 조선에서 재해와 흉년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많은 이재민들이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비옥한 간도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간도지역의 한인 인구는 1860년대에 이미 7만 7천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주초기에는 한인이 통화(通化), 집안(輯安), 장백(長白), 신빈(新賓), 용정(龍井)등 두만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정착하였으나 점차 연변과 기타지역으로 확산하여 중국 동북부 지역에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일제 식민지통치 기간에 만주로 한인 인구이동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중국 동북부 지역의 한인 사회는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1910년부터 1918년에 걸쳐 진행된 식민지 정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조선 농민의 소작화와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회사 등에 의한 조선 농민의 체계적인 착취와 궁핍화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수는 농민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만들고 광복군을 구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서전서숙, 대성중학교등 민족학교를 만들어 교육에 힘썼습니다

지속적인 인구유입으로 인해 한인 인구는 1910년에 22만 명에 달하였고 1930년에는 60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건설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와 식량기지로 활용하고자 하는 방안을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1년에 1만 호씩 이주시킨다는 계획아래 한인을 집단으로 이주시킨 결과 집단이주로 인해 1930년에 60만 명에 달했던 한인 인구가 1940년에는 1백45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한인들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소외 계층과 소수민족을 지지하는 모택동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을 도와 해방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한인들이 국민당에 대항해서 공산당을 지지한 이유는 국민당이 한인을 차별하여 한교(韓僑)라 부르며 귀국을 종용한 반면 공산당은 일찍이 한인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민당과 결탁한 토비(土匪)들이 한인을 포함한 양민들을 약탈할 때 공산당과 함께 대항했습니다

 

한인은 이전의 항일전쟁은 물론 해방전쟁에서도 인구비례로 볼 때 중국의 56개의 민족 중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신중국을 건설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연변을 위시하여 동북3성 전역에서 해방전쟁에 참가한 한인의 수는 62,942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 목숨을 잃은 한인은 3,550명이나 되는 등 많은 아픔과 희생을 겪어야했습니다

 

그러한 공로로 한인은 이주민족이면서도 토지개혁, 정권건설, 해방전쟁 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 공민으로 자격을 부여받았고 신중국을 건설하는 핵심민족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에 소수민족의 민족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종합대학인 연변대학을 설립하였고, 1952년 9월 3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건설하였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건설하고 승승장구하던 한인은 봉건제와 관료주의를 타파한다는 명목아래 20여년 간 추진된 개혁운동의 와중에 한인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1956년부터 전개된 반우파운동, 1958년의 대약진운동, 1968년의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진 약 20년간의 시기에 초대 자치주 주석 주덕해를 비롯해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 대부분이 숙청당하거나 비판받았으며 이에 따라 많은 수의 지식인, 학자, 기술자 등이 북한으로 망명·이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박해에 의해 한인은 중앙의 지시에 철저히 순응하는 식의 대응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산아제한정책에 한인이 중국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한 것도 소수민족으로서의 심리적 불안감에 따른 과잉충성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문화대혁명의 폐해로부터 국민을 살리기 위해 중국은 1970년대 말부터 경제, 정치체계의 개혁을 단행하고 1980년대 초부터 연해도시를 개방하면서 산업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의 시작은 집체적 생산양식을 버리고 개개 가족이 생산을 주관하고 세금을 내게 하면서부터입니다 이 정책은 전국으로 빠르게 파급되어 1984년부터는 전 농가의 98%가 가정생산도급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생산양식에 익숙해있던 한인은 새로운 분산경영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반면 한족은 다종경영과 3차 산업을 발전시켜 두 집단 간의 경제력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이 연해도시를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제력은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연변주의 GDP는 전국 30개 민족자치주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1997년에는 4위로, 1998년에는 5위로 떨어졌습니다 재정수입도 1993년의 2위로부터 1997년의 7위로 떨어졌습니다

 

연변경제의 저발전으로 인한 실업, 저소득, 생활수준의 저하는 중국의 대도시와 한국과 같은 국외로의 인구이동을 유발하였습니다 이농향도(離農向都)의 인구이동으로 교사와 학생의 유출이 심해지면서 특별히 농촌의 민족교육이 부실해지자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대도시로의 인구이동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인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은 1990년대 이후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해외이주입니다

현재 전체 한인인구의 1/3 이상이 장기적으로 외국에 거주하면서 경제, 교육 등의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인의 해외진출은 주로 모국인 한국에 집중되어 있으나, 일본, 미국 등지에도 많은 수의 한인이 진출하였고 조선족 타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재중한인의 한국진출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이후에 한국에 친척이 있는 한인이 친척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계 한인들은 대략 60만 명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에 진출한 중국계 한인들은 돈을 벌어 귀국하기보다는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거나 혹은 재입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초기의 불법체류에서 점차 합법적인 진출과 체류로 성격이 바뀌고 있습니다

 

5.일본

일본 이민
일본 이민

 

 

일본으로의 재일한인의 이주와 정착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 통치라는 역사적 조건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비록 이주의 형태와 동기는 다르더라도 식민지 통치시기에 강제로 끌려와서 착취당했다는 인식은 재일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모국과 거주국과의 관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재일한인을 구분해 보면 농민층 몰락에 따라 도항한 제1기(1910년부터 1938년까지), 강제연행에 의해 도항한 제2기(1939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의 패전 후 일본에 남게 된 제3기로 나뉩니다 종전 이전에 도일한 한인을 구세대(old timer)라고 한다면 1989년 한국의 해외여행 자유화조치로 도일한 한인은 ‘뉴커머’(new comer)라고 불리는데 이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를 재일한인 형성사의 제4기로 볼 수 있습니다

 

한일강제병합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일본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882년에 4명, 1909년에는 790명의 조선인이 일본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유학생이고 소수가 외교관, 정치적 망명자들입니다

1907년에 도쿄 유학생은 그 수가 거의 5백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이 서구문명을 통하여 성공한 이유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학업을 마치기까지의 일시체류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하의 재일한인과는 질적으로 성격이 다릅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전에는 일본이 대부분의 산업에서 외국인노동자를 금지했기 때문에 한인 노동자의 유입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당시에도 각종의 육체노동자들이 도일한 것으로 알려져 일본경제가 초기 산업화단계에서 조선인 노동력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조선인은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외국인노동자 입국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파급효과로 활황을 맞은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아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자본가들은 국내의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저임금의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습니다 그들은 모집 브로커를 조선 지역에 파견하여 노동자 모집경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재일조선인의 수는 1915년의 3,917명에서 1920년에는 30,189명으로 5년 만에 8배가량 증가하였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서 도항하는 조선인이 급증한 것은 일본에서의 유인요인도 있었지만 조선에서의 유출요인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강압정치를 시작했고 이때 식민지 경제정책의 중심이 된 것이 토지조사사업(1910년 3월부터 1918년 11월까지)이었습니다

 

일제는 토지의 소유권을 실제로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인정한 것이 아니고 그 토지와의 연고관계를 신고한 사람에게 인정해 주는 신고주의를 채택하였습니다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일단 ‘국유’로 편입된 후 일본인 지주 및 토지회사에 불하되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농민들이 문맹이었고 근대법에 무지했기 때문에 자작농이라 하더라도 토지소유관계를 신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많은 농민들이 지금껏 경작하던 토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1920년 조선인 농가 중 자영농이 23%, 반자작이 37%, 소작농이 40%였던 것이 1940년이 되면 각각 18%, 23%, 59%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과잉인구로 집적되어 소작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악순환을 이루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국내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거나 산간벽지의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유출되었습니다.

 

1920년대에 일제는 조선에서 산미증산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의 쌀생산은 증가하였지만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욱 많아 조선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농인구가 증가하였으나 국내의 경제발전 수준이 낮아서 이들을 임금노동자로 수용하지 못하자 상당수가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경제와 사회여건은 결코 한인이 이주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1923년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에는 한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넣는다고 믿은 일본인 민병대원들에 의해 6천 명 가량의 한인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리고 1929년의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경제는 불경기와 실업문제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1931년에 국내 실업자수는 3백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일본의 실업문제가 심각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내무성의 요청에 따라 1925년 8월에 도항저지제를 실시하여 한인의 도항을 저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항하는 한인의 수가 줄지 않고 증가하여 1920년의 30,189명에서 1930년에는 298,091명, 1935년에는 625,678명, 1940년에는 1,190,444명, 1944년에는 1,936,843명으로 급증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에서의 생활고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의 생활고를 피해 일본으로 도항한 사람들은 농촌에서 유출된 과잉 인구의 일부분에 불과하였고 지리적 관계로 일본에 도항한 사람들은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와 같은 남한지역 출신들이 주류였습니다

 

1923년의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조사에 따르면 이 해 출신지가 알려진 도항자 72,815명 가운데 경상남도 출신이 39%, 전라남도(제주도 포함) 출신이 25% 경상북도 출신이 16%를 차지하였습니다

 

지연과 함께 친분관계도 도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27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주자의 73%가 친척 또는 친구를 통해서 일자리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도항이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조선에서 같은 지역출신은 일본에서도 같은 지역과 산업에 집중되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확대에 따른 병력과 일본 본토의 전시산업을 지탱할 노동력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는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표하고 1939년 7월에 노동력 동원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1939년 9월에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을 발표하여 강제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형식은 ‘모집’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연행이었습니다

 

탄광, 광산으로의 조선노동자 강제연행이 시작되었고, 후에 철강, 토목산업 등 그 외의 모집분야에도 확대되었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국민징용령을 1944년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전부터 군과 관련된 곳에 조선인 노동자징발과 학도징용이 이루어졌고 이에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연행된 인원은 724,787명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명을 합하면 조선인 강제연행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추가하여 여성자원봉사대의 이름으로 20만 명의 여성이 동원되었는데 이 중 8만 명 가량이 소위‘종군위안부’로 동원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발표에 의하면 1945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남한으로 귀국한 사람은 약 94만 명이며 1950년까지는 104만 명으로 되어있습니다

 

물론 이 수치에는 자비 귀국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에 실질적인 귀국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렇듯 귀국에 성공한 이들을 제외한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어 일본의 동포사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종전 시 인원의 약 20%를 상회하는 60만 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잔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종전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한인 중 본국과 가장 네트워크가 취약한 사람들로 알려졌다. 출신지역별로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 충청도 등 한반도의 남부 출신들이 대부분이며 한인 최대밀집도시인 오사카의 경우에는 제주도 출신의 비율이 상당히 높습니다

다.

 

이렇듯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잔류를 하게 된 것은 경제적 사정과 조선의 정치사회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46년 3월 맥아더 사령부가 발표한 ‘조선인, 중국인, 류우쿠우인 및 대만인의 등록에 관한 총사령부 각서’에 의해 귀국희망자 등록을 실시하고, 조선인 귀환자가 고국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금액을 1천 엔 이내로 제한하였습니다

 

지참금액을 1천엔 이내로 제한한 것은 당시 가난한 생활을 하던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사람들에게는 어렵게 모은 재산을 포기하고 가야했고,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이 생활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보장된 바가 없었기에 섣불리 일본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으므로 정치적이나 사회적으로 조선에 머물러 있을 경우 자신들에게 돌아올 피해를 고려하여 귀국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일단 귀국을 하였다 하더라도 이러한 전반적인 조선의 상황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이방인으로서 소수자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1980년대 말 이후 일본의 경제호황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소위 ‘뉴커머’들이 재일한인사회에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뉴커머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식민지출신자들의 법적 지위가 외국인으로 변경된 이후 도일한 외국인들로 주로 1980년대 일본의 국제화가 급속히 진행됐던 거품경제시기 이후에 급속도로 늘어났습니다

 

현재 155만 명을 넘어선 재일외국인들 중 재일한인들이 63만여 명으로, 이 가운데 특별영주자 약 52만 명을 제외한 11만 명 중 대다수가 뉴커머 범주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뉴커머의 실제 수는 상당수의 불법체류자들까지 포함해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고 그들의 1/3 이상이 도쿄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쇼쿠안도리의 코리아타운으로 대표되는 뉴커머들의 거주지와 직업·생활양식은 올드타이머(oldtimer)들의 그것과는 많은 점에서 구별되며 둘 사이에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존재합니다

 

뉴커머 중 사실상의 정주자들은 대개 3년마다 체류연장허가를 받습니다 뉴커머의 주요 구성원인 기업 및 기관 파견 주재원들과 그 가족들의 체류기간은 대개 5년 정도입니다

 

최소 6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불법체류자 중 상당수는 유흥업소나 토목건설현장 등에서 일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정보기술 관련분야에서 한국업체의 일본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으며 컴퓨터 프로그래머만 1천 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생활정보 월간지 <아리랑>의 발행인인 김종영씨는 “한국인 보석가공 기술자가 없으면 긴자의 보석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며 “신발과 가방·석재가공 분야에도 동포 뉴커머의 비중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 역시 1991년 말에 도일한 뉴커머입니다

 

지금 일본 전국에는 한국 식품가게만 1200여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뉴커머들이 올드타이머에 비해 과거사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구김살이 없는 세대'로 행동양태도 '당당'해 재일동포 사회 전체의 의식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6.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 이민
중앙아시아 이민

 

독립국가연합은 1991년에 구소련이 해체된 후 그해 12월 21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중심으로 발틱 3국을 제외한 12개 구소련 공화국들이 결성한 정치연합체입니다

 

한인들은 이런 정치연합체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고려사람 또는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러시아·독립국가연합 한인의 이주는 제정 러시아 시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860년에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조약으로 러시아는 우수리 강 동쪽 지역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러시아와 조선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인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근접성은 양국 간의 관계를 촉진시켰습니다

1869년부터 1870년에 발생한 이북지역의 대기근은 러시아로의 대규모 이민을 일으켰습니다

 

이민이 시작되고서 처음 10년 동안 이 지역 지방관리들은 한인 이민자들에게 관대했습니다

이들이 거의 황무지와 같은 땅을 개간하고 소작인, 임차인, 또는 농업노동자로서 농업생산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짜르정부는 러시아인의 이주를 통한 개발을 장려하였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인과 한인의 인구증가는 경작할 토지를 둘러싼 경쟁을 일으켰고, 현지 주민들과 관료들은 경쟁으로부터 한인을 배제하기 위해 더 이상의 한인의 이주를 금지하고 이미 정착한 한인을 내륙지방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1884년에 체결한 ‘조로수호통상조약’에서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법적 지위와 이주를 통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인에 의한 개발은 이후에도 계속 추진되어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난 즈음에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는 10만 명가량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중 81,825명이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였고 이 수는 연해주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했습니다 연해주 지역으로의 이주는 처음에는 경제적 문제로 촉발되었지만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연해주 지역을 독립운동 전진기지로 삼기 위한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지식인들이 고국 땅을 넘어서 이 지역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망명, 독립운동 성격을 띠는 이주는 조선에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1900년을 넘으면서 27,880명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54,076명으로 거의 두 배로 증가하였습니다

 

가장 큰 규모의 이주는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발생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연해주 지역에서 정착하였습니다

 

한인은 연해주 지역에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고 만주에서와 마찬가지로 논농사를 이 지역에 처음으로 도입하였습니다

이들은 소규모의 가족을 중심으로 파종에서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영농의 전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물론 비록 적은 토지일지라도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단위 면적 당 수확량을 높여 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진적인 영농방법과 특유의 근면성으로 인해 한인은 연해주 지역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한인은 이 지역에서 경제적 성장에 기초하여 민족문화, 교육을 장려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고국의 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 기지로 발전시키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1928년 전로중앙집행위원회에 극동조선공화국의 수립을 청원하는 등의 자치주 건설운동으로 표면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움직임은 좌절되어, 고려사람은 다른 지역으로 강제 분산되었습니다

 

특히 1937년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한인이 일본의 첩자역할을 할 것이라는 군사적 우려와 중앙아시아의 낙후된 지역을 이들의 노동력에 의해 개간한다는 경제적 목적 하에 171,781명의 한인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한인에게 있어서 1937년 8월 21일은 자신들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날이었습니다

이날에 소련 지도부는 극동지역의 한인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집단 이주시킬 것을 결정하였고 이주대상이 되는 사람은 소유물, 농기구, 동물 등을 소지할 수 있고, 이주민이 두고 간 동산, 부동산, 파종 종자 등은 가격을 계산하여 보상한다고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경우 국외로 떠날 수 있게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공화국 인민위원회는 이주민을 위한 정주구역과 지점들을 빠른 시일 내에 선정하고, 이주민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경제활동을 재개하도록 보장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말로는 상당히 인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주에 필요한 충분한 준비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비좁은 차량에 연료, 의료, 식량 외의 다른 소지품을 가져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두고 간 재산에 대한 보상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만주와 조선으로 이주하려고 할 경우에는 이적행위자로 간주되어 처벌받았습니다

 

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는 1938년 3월에야 이주민에게 정주구역을 정해주었으며 경제활동 재개에 필요한 도움은 물자의 결핍으로 줄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의 희생자였던 중앙아시아의 인민들은 수천 가구의 한인 이주민의 생활보장을 할 형편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강제이주 후 한인의 정착은 이주 과정만큼이나 힘든 것이었습니다

 

물자의 부족, 주거문제, 노동자, 공무원, 가내수공업자의 취업, 농기구의 부족, 의료시설미비 등의 문제가 당장 발생하였습니다

 

이주민들은 주로 새로운 집단농장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는데 1939년 초 카자흐스탄 전 지역에 총 70개의 한인 집단농장이 형성되어 8,037가구 35,724명이 거주하였습니다

 

이 중 13개는 어업 집단농장이었고 나머지는 농업 집단농장이었습니다

 

구소련 체제에서 한인은 러시아인 지배의 민족계층체계에서 러시아인과 원주민족의 중간에서 중개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원주민족에 비교해서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이들은 거주국 사회에 동화를 추구하면서도 밑바닥계층에 남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구조를 최대한 활용하여 신분상승을 추구하였습니다

 

적성민족이라는 신분상 제약으로 인해 한인은 정치, 군사, 공직 분야로의 진출은 일찍이 포기하고 대신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경제 분야, 특히 고본질(계절농), 집단농장, 자영농업, 자영업에서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농업분야에서도 쌀, 야채, 과일과 같이 현지 원주민들이 경작하지 않는 작물에 집중함으로써 원주민들과의 경쟁을 피하였습니다

 

이민 1세가 농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후에는 그 축적된 자본을 자녀세대의 고등교육에 투자하였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부모들은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한인은 타민족들에 비교해서 높은 도시화율을 기록하였습니다

 

대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민 2세는 졸업 후 도시에서 전문직, 기술직에 종사하면서 도시에 정착하였습니다

주류사회에 진출하였어도 상층계급으로는 진출하지 못하고 러시아인과 원주민 사이의 중간계층에 머물면서 러시아인 지배 사회체제가 유지되고 운영되는데 기여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았습니다

 

한인이 신분상승의 전략으로 도시화, 고등교육, 전문직화를 추구하면서 이들은 언어, 의식, 생활방식 등에서 러시아의 사회문화에 동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동화가 한인의 민족정체성을 약화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주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한 후에도 여전히 민족집단에 대한 소속의식을 유지하였습니다

1991년에 구소련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한인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자신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였던 러시아인의 힘이 약화되고 대신 자신들이 경멸하고 거리감을 두어왔던 원주민족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 후 잃었던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되찾고 민족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타민족들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울러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고실업, 부정부패,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불평등 등의 사회문제들이 삶의 질과 기회를 낮추고 있습니다 경제적 문제의 심화는 사회의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민족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증폭시켰고,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들은 공공연한 차별과 배척을 피해 모국으로 이주하는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한인은 모국이 둘이 있어도 남한과 북한 어느 곳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현지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정치경제적 불안과 부상하는 민족주의를 피해 한인은 1990년대부터 남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과 1999년 사이에 러시아의 한인인구는 107,051명에서 125,000명으로 17,949명이 증가하여 16.8%의 인구증가율을 보였습니다

2011년에는 213,020명으로 증가해서 1999년 대비 70% 증가했으며 한인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볼고그라드 지역과 우크라이나에 집중하여 살고 있습니다

 

고본질’이라고 하는 계절농사에 익숙한 고려사람은 이곳에서도 당근, 양배추,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등 채소류와 수박과 메론 등 비교적 고부가의 과일류 농사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한인 외에 극동의 사할린에도 한인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1860년대 자발적인 농업이주로 형성되었지만, 본격화 된 것은 일제말기의 강제징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일제말기 이 지역에 강제징용된 한인은 무려 15만명 정도에 이르렀는데 제2차세계대전 종전 당시 약 43,000명의 한인이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본국적 혹은 일본인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송환되지 못했으며, 소련에서는 한국과 수교를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문제해결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2011년 3월 현재, 사할린에는 약 3만여 명의 한국계 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중에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인 한인 1세는 약 1,500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2011년 3월 현재까지 영주귀국 시범사업·확대사업 등으로 3,906명이 한국으로 영주귀국 하였습니다

 

7.동남서남아시아

동남서남아시아 이민
동남서남아시아 이민

 

동남아시아 지역 이주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지만 자발적이고 본격적인 진출은 196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 기업들이 목재, 석유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남아로의 진출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1970년대 베트남전이 끝나고 우리나라의 많은 기술자들이 중동과 동남아시아, 호주 등지로 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동남아의 싼 임금을 노리고 한국인이 공장을 세우고 현지인을 고용하기 시작하면서 한인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필리핀 등 영어권 국가에 어학연수를 가거나, 은퇴이민을 목적으로 한 한인의 이주가 많습니다

 

2011년 외교통상부 통계에 의하면 동남아는 필리핀(96,632명), 베트남(83,640), 인도네시아(36,295명), 태국(17,500명), 싱가폴(166,50명) 등에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서남아시아는 1970년대 이후 ‘중동특수’라는 말로 대변되는 건설붐으로 이주가 본격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건설 근로자들의 이주는 가족을 동반하지 않는 남자들만의 집단 이주와 일정기간 후 집단적 귀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 현지에 남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영구거주 보다는 취업 등을 위한 장기체류자의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건설붐이 한풀 꺾이자 이 지역 한인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진출한 건설 근로자는 외화획득에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2011년 외교통상부 자료에 의하면 현재 이 지역에는 11,072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데 주요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2,821명), 아랍에미리트(5,607명),카타르(2,184명), 쿠웨이트(1,000명) 등입니다

 

이 지역에 진출한 한인들은 식품판매업, 무역업, 간호사, 선원, 태권도 사범 등 다양한 직종에 진출하여 생활하고 있습니다

 

8.유럽

유럽 이민
유럽 이민

 

외교통상부의 2011년 재외한인 현황에 따르면 유럽 국가 중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들은 영국(46,829명), 독일(31,518명), 프랑스(12,684명) 등입니다

 

유럽으로의 한인 이주는 지역에 따라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북유럽 지역으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등이 이에 속합니다

이 중에서 한인이 가장 많은 나라는 스웨덴(2,050명)인데, 6.25전쟁 참전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한국인들이 이주를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이 지역에는 한국고아 4만여 명이 입양되어 성장함으로써 한인사회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서유럽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주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상당수의 사람들이 한국 국적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중부유럽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1960년대 독일파견 광부, 간호사의 정착으로 한인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광부의 파견은 1963년 한국-독일간 체결된 기술협정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독일은 자국민들이 고된 육체적 노동을 기피하자 이를 담당해 줄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했으며 우리나라는 취업난 극복을 위해 해외 인력수출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963년 한국-독일간 기술협정이 체결되었으며 같은 해 247명을 시작으로 한인들의 독일 광산 취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의 요구에 따라 광부파견을 위한 신체검사를 엄격히 실시하였으며 3년마다 인력을 교체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광부로 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던 고학력층으로 광산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1977년까지 8,395명이 독일로 진출하였습니다

 

한편 간호사는 1965년 한국 의사 이수길, 이종수씨가 한국간호사를 독일 병원에 취업시킨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독일병원협회가 한국의 해외개발공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1969년 한국에서 간호사를 모집하였습니다

 

독일로 간 간호사는 1965년 18명을 시작으로 1977년까지 10,371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도 광부와 같이 최초 3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진출초기에는 언어장벽과 문화적 차이로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독일어를 어느 정도 습득하게 되면서 성실성과 간호능력을 인정받아 독일병원에서 장기체류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편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의 상당수가 결혼적령기의 미혼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광부와 간호사가 결혼, 독일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간호사들은 광부들 외에도 유학생, 독일인 등과도 결혼해 독일에 정착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광부들은 간호사와 결혼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결혼을 통해 장기체류를 하게 되었으며, 이후 광산을 떠나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습니다

 

광부들은 제한적 공간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독일어에 서툴렀고 특별한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직종으로의 이직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산에서 맺어진 끈끈한 단결력과 고된 육체노동으로 다져진 강한 정신력으로 독일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독일을 발판으로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살기도 하였는데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 한인촌의 기초를 잡은 사람도 실은 독일에서 이주한 광부들이었습니다

 

독일파견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은 한국사회에 외화가 도입되는 하나의 창구였습니다

독일광부, 간호사들이 고향으로 보내는 송금액은 외화가 귀하던 시절 우리경제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동유럽 지역으로 198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기 시작하면서 주재상사원의 이주가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최근 유럽 내 한인의 경제규모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한국과 유럽의 교역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영국 등 주요 유럽국가들은 물론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한국기업의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주요 교역대상국은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입니다

 

9.아프리카

아프리카 이민
아프리카 이민

 

아프리카 지역의 한인은 의료봉사나 경제원조를 위한 인적자원의 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외에는 선교사나 태권도 사범, 기업진출을 통한 주재상사원 등이 이 지역에 들어와 한인사회를 형성하였습니다

 

또한 스페인령 라스팔마스는 우리나라 수산업의 전진기지로 전성기인 1975년에는 7천여 명의 선원이 일할 정도로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2011년 외교통상부 자료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은 남아프리카공화국(4,186명), 알제리(1,181명), 나이지리아(692명), 가나(691명) 등입니다 이 중에서 나이지리아, 가나 등은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우리나라 기업들이 진출해 있으며 남아공의 경우, 흑인차별 철폐이후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권을 형성하면서 1990년대 이후 이주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지역입니다

 

10.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

 

2011년 외교통상부 자료에 의하면, 오스트레일리아(132,287명), 뉴질랜드(28,420명) 등 이 지역에 16만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이민은 1973년 호주의 백인이민정책이 폐지되어 소수의 전문 기술자가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1974년 베트남전 파견 기술자 5백여 명이 대거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하면서 본격화 되었습니다

 

뒤이어 남미로 이민갔던 사람들의 일부와 서남아시아 건설 근로자들의 이주가 있었으며 그 후 입양, 가족초청, 취업 등에 의한 이민이 급증하여 한인사회가 확대되었습니다

 

뉴질랜드의 경우는 1991년 새로운 이민법의 적용 이후 영구이주를 위한 이민자들과 어학연수를 위한 청소년 유학생 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10.재외 한인의 시대별 변천

이민사
이민사

 

재외한인의 이민은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중국인,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등 세계의 여러 민족들에 비교해서 짧습니다

 

그렇지만 재외한인처럼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 독립국가연합, 호주,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처럼 다양한 정치경제 체제에서 다양한 형태의 적응을 시도했던 민족은 역사상 그리 흔치 않습니다

 

재외한인 이민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이 기근, 빈곤, 압정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이주하였습니다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경제유민(流民)으로서 당시 입국이 금지되었던 지역에서 농지를 개간하면서 신분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갔습니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한인의 이주는 190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하와이 거주 일본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이 1905년에 한인 이주를 금지하면서 더 이상의 이주는 불가능해졌습니다

 

1905년까지 7,226명의 이주자들이 도착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20대의 독신 남성이었습니다

 

이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사진결혼의 형태로 1,000여명 가량의 한인 여성들이 1924년까지 하와이로 건너가서 이민 가정을 형성하였습니다

 

중남미로의 이주는 1905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1,033명이 떠난 것이 효시이며, 이들 중 300여명이 1921년에 경제난을 피해 쿠바로 재이주하였습니다

 

이들과 후손들은 모국과의 연계가 끊어지자 아주 작은 공동체를 유지하다 현지 사회문화에 급속히 동화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한국이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일제 통치시기에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정치적 난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은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만주지역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인들의 대규모 집단이주를 실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1930년대 후반 만주지역의 한인인구는 약 50만 명 정도 증가했는데, 이중 약 25만 명 정도가 집단이주자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경제호황을 맞아 한인들이 노동자의 신분으로 도일하였으며,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규모의 한인들이 광산, 전쟁터로 끌려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재일한인의 규모는 급속히 증가해서 일본이 미국에게 패한 1945년 8월까지 약 230만 명 정도에 이르렀다가 패전 후 많은 한인들이 조국으로 귀환하자 급속히 감소하여 1947년에는 598,507명으로 급감하였습니다

 

세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정부가 이민정책을 처음으로 수립한 해)까지인데,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 가족재회,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하였습니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천여 명 가량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동일시기에 5천여 명 가량의 아동들이 전쟁고아로서, 혼혈아로서, 또는 입양아로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위와 같은 두 부류의 이민자들이 전후 한인 이민자의 2/3을 차지하였습니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천 명 가량의 유학생들이 학위 취득 후 고국에서 누릴 사회적 권위와 출세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 앉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활짝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네 번째 시기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인데 이때부터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일본, 독립국가연합을 제외한 대부분의 재외한인 이민자와 그 후손은 이 시기에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1962년에 한국정부는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로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을 시작하였습니다

 

1962년의 이민정책의 근본 목적은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내 인구압력을 줄이고 해외에서 일하고 사는 교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집단이민은 1963년 브라질로 103명의 농업 이민자들이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농장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중남미 국가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농업 경험이 없었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 너무 힘든 일이어서 곧바로 대도시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유럽은 1960년대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들을 중심으로 유학생, 주재원 들을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였습니다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는 북서구 유럽계 이민자들만을 선호하던 이민법이 1960년대 중반에 개정되어 이민 문호가 한인에게도 열리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화이트 칼라직에 종사했던 중산층이 1960년대 중반 이후의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정점으로 감소하였고, 오히려 이주를 포기하거나 역이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해외 이주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의 이주는 줄어든 반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의 이주는 증가해서 해외이주의 지역별 분포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종래의 가족초청 이주는 줄어드는 반면 사업이주와 취업 이주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편 1997년 재외동포재단의 설립, 1999년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 공포 등에 따라 우리나라의 재외동포 업무는 보다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또한 2012년 4월 1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재외국민의 투표권이 인정되어 해외에 거주하더라도 한국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 선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이민사는 단순히 국경을 넘는 개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와 소통하며 성장해온 역사의 일부입니다. 뿌리와 날개라는 상반된 갈등 속에서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며 공존해온 이민자들의 발자취는 앞으로도 우리의 삶과 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남길 것입니다.

 

과거에서 배우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이민사의 이야기는 무한한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세계 속 한국인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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