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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니는 세계 곳곳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나, 섬나라계 사람들이 이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일본, 영국이 대표적이며 이를 서구권에서는 'British Teeth'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일본인들에게 유독 많은 덧니가 많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따라가 봅니다.
일본의 여성들 사이에서 섹시한 뱀파이어처럼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덧니(정확히는 송곳니 부분)를 만드는 성형수술을 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서구에서는 고른 치아가 사회적 지위와 미의 상징이기에, 당시에 그 뉴스를 접한 서양인들이 여성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문화가 아니냐며 당혹스러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일본도 치아교정을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덧니 자체가 귀여움을 어필할 순 있어도 세련된 이미지는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당사자는 싫어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당장 덧니로 유명했던 아무로 나미에나 이타노 토모미 등의 여자 연예인들 역시 아이돌 이미지를 버리기 위해 치아교정부터 했습니다.
이외에도 여배우들은 깔끔한 이미지가 중시되기 때문에 어느정도 티브이에 나오면 아예 래미네이트는 기본이고 인지도가 좀 있으면 전면적으로 싹 갈아엎기도 합니다.
코미디언들조차 교정과 치아미백을 하는 것을 보면 결국 다 하게되는 모양인 듯합니다. 교정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점차 치아교정 과정 중에서의 심미적 문제를 신경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투명교정이나 설측교정 등의 방법도 점차 각광받는 중이라고 합니다.
보통 치열이 가지런한 것을 세련되고 '문명화된' 것으로 보는 경향으로 인해 덧니는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를 대표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덧니를 통해 시골 출신이라는 사실이라든지, 순진하면서도 활기차거나 야성적인 매력 등을 강조 합니다.
일본인에게 유독 덧니가 많은 이유는 약 1200년 동안 육식금지령으로 인해 턱이 퇴화한 결과라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배경을 따라가 봅니다.
1. 베르크만의 법칙
추운 지방에서 사는 정온동물의 체중이 따뜻한 지방에서 생활하는 같은 종의 체중보다 크다는 현상으로 1847년 독일 생물학자 C. 베르크만이 발견하였습니다.
이 현상은 체중에 대한 체표면적의 비율이 작아져서 체열의 발산이 방지되므로, 이것은 한랭한 지방에서 생활하는 항온동물의 체온 유지에 대한 적응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베르크만의 규칙이라고도 합니다. 1847년 독일 생물학자 C.베르크만이 발견한 현상입니다.
이에 의하면 정온동물은 일반적으로 같은 종(種)이라도 한랭한 지방에서 생활하는 개체가 온난한 지방에서 생활하는 개체보다 체중이 큽니다. 또 근연(近緣)의 이종(異種) 사이에서는 대형의 종(種)일수록 한랭한 지방에서 생활하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아울러 ‘베르크만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체중에 대한 체표면적의 비율이 작아져서 체열의 발산이 방지되므로, 이것은 한랭한 지방에서 생활하는 항온동물의 체온 유지에 대한 적응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베르크만의 법칙을 몰랐어도 북유럽등의 추운 지방의 사람들의 키는 상당히 큽니다.
아울러, 동남아시아 지방의 열대성 나라들을 가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체격이 왜소하고, 코가 좀 펑퍼짐하게 넓습니다.
반대로 추운 극지방, 위도가 높은 곳의 있는 나라의 사람들은 체격도 크고, 코도 오뚝합니다.
이는 추운 지방일수록 많은 공기를 흡수하여 열을 발생하기 위함이고, 더운 지방일수록 가급적 공기를 내뱉어 더운 공기를 순환시키고자 함이라는 정설이 많습니다.
이를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한 과학자가 바로 베르크만입니다.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동물은 같은 종일 경우, 추운 곳(연평균 기온이 낮은 곳을 의미)에 살수록 일반적으로 체격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면, 중부유럽이나 남유럽 지역보다 북유럽이거나 북유럽에 가까운 핀란드, 네덜란드, 덴마크가 키 상위권 국가 통계로 들어가는 것, 또한 한반도에서 전통적으로 키가 컸던 지역은 현재 북한 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 그중에서도 더 춥고 척박한 함경도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북방계 사람들이 추운 것을 피하고자 남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 중 하나가 한반도라고 합니다.
또한 일본은 섬으로 4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위의 북방계 민족들이 내려와 살기엔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종적으로 일본은 남방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한반도에는 북방계 민족과 섞여서 인종을 이루었다는 설이 맞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일본인들보다 체형이나 체격이 큽니다.
또 동아시아에서 키가 가장 큰 지역은 상대적으로 추운 지역인 대한민국과 만주이며, 중국 남부의 경우에는 대한민국이나 비슷한 위도에 있는 사람들보다 체격이 작습니다. 더 더운 곳인 동남아시아의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체격이 동북아시아에 비해 작습니다.
이 한반도의 작은 땅에서도 위도에 따른 체격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19세기 독일의 생물학자 카를 게오르크 루카스 크리스티안 베르크만(Karl Georg Lucas Christian Bergmann, 1814~1865)이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항온동물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합니다. 추운 곳에 사는 항온동물일수록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으로 발산되는 몸의 열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로 합니다.
반대로 더운 곳에 사는 항온동물의 경우, 물질대사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열을 주변으로 발산해야 하는데, 이때 생기는 열의 발산은 몸의 표면에서 일어나는데 몸의 표면적이 좁을수록 발산하는 열의 양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체격이 커지면 몸의 총 표면적은 늘어나지만, 몸의 부피에 대한 표면적은 줄어듭니다. 수치로 계산해 보면, 몸의 가로, 세로, 높이의 길이가 두 배가 될 때 부피는 세제곱인 8배로 늘어나는 반면, 표면적은 제곱인 4배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추운 지방에 사는 항온동물은 체격이 클수록 체온유지에 유리하고, 더운 지방에 사는 항온동물은 체격이 작을수록 유리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추운 만주와 한반도 북부, 연해주 지역에 사는 시베리아호랑이는 따뜻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사는 수마트라호랑이보다 덩치가 크며, 북부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사는 불곰 역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분포하는 말레이곰보다 덩치가 큽니다.
인간에게도 이 법칙이 적용됩니다.
중국 북부 지방은 남부 지방보다 평균 신장이 더 큽니다. 다만 둘은 민족, 유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북부가 남부보다 큰 이유가 베르그만의 법칙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한 북유럽도 다른 유럽인들보다 평균 신장이 더 큽니다.
단, 남유럽 중에서 구 유고슬라비아권 국가들과(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등)와 불가리아처럼 발칸반도 지역에 속한 일부 국가들의 경우는 좀 다른데 남유럽임에도 남성 평균 신장이 180cm을 넘습니다.(참고로 가장 큰 평균키를 갖는 나라는 네덜란드와 크로아티아입니다. 평균이 183CM라고 합니다).
상당합니다.
이쪽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남유럽에 속해있지만 대부분 산악지대가 많아 지중해 연안이나 흑해 해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따뜻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거기에 이들 국가의 주류 민족들도 유전학적으로도 본래 따뜻한 곳에서 살던 라틴, 그리스 계열이 아니라 추운 동유럽 북부 지역에서 남하해 온 슬라브 계열에 속 합니다.
이는 한국 안에서도 적용되는데 1930년대 일제가 조사한 자료를 보면 가장 북쪽인 함경도, 평안북도가 제일 크고 충청남도, 전라북도가 가장 작았습니다. 또한 병무청에서 실시하는 신체검사에서도 서울, 경기, 강원 등 중부지역의 평균키가 경상, 전라 등 남부지역의 평균 신장보다 매년 크게 나옵니다.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은 편에 속하는 인종은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등 대부분 따뜻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규분포를 그린다면 분명히 예외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폴리네시아인은 열대 태평양 섬에 거주하는 인종이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체격이 좋습니다. 이는 이들이 조그마한 카누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는 해양활동이 잦은 민족이었기에 일반적인 기온으로 인한 체온하강 대신 해양활동으로 인한 저체온증에 적응하기 위해 체격이 커졌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며, 실제로 근육은 티가 나지 않고 피하지방이 잘 쌓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더 락(프로 레슬러, 영화배우)과 같은 유명인들도 체지방량을 아무리 줄여도 근육이 도드라지지 않아 지방흡입을 할 지경인지라 예외적으로 봐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쪽 남성들의 배에 식스팩을 본 적은 없는 듯합니다.
이러한 폴리네시아인들의 덩치는 단순히 서구권의 영향으로 패스트푸드가 보급되어 비만화가 되고 체격이 늘어났다고 하기엔 마찬가지로 패스트푸드가 보급되어 비만율 1위에 도달한 평균 신장이 170cm인 멕시코와 비교해 쿡 제도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2019년 기준 만 19세 남성 평균 신장은 178.3cm로 차이 나기에 순수한 영양공급으로 인한 차이가 아닌 듯합니다.
유의해야 할 점은 이 법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체격이며 신장은 체격에 의해 부차적으로 형성되는 요소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비교적 따뜻한 지역에 사는 남슬라브족은 유럽에서 가장 키가 큰 집단이지만 비교적 마른 체형입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집단으로 알려진 동아프리카의 닐로트계 흑인들도 마른 체형입니다. 몽골도 겨울이 되면 굉장히 춥지만 몽골인은 체격은 다부진 편이나 평균 신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으며 다만 동아프리카와 몽골은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며 몽골인들은 승마로 인해 O다리로 다리가 휜 경우가 많다는 걸 감안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외가 많은 법칙이 그래도 생물학계에서 의미 있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항온동물의 체온-체적관의 관계가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있고 증명사례도 많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크기는 붉은 여왕 효과로 항상 최적크기로 맞춰지게 되는데 생물의 크기가 크다고 좋은 것은 아니며 작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생물군계에서 피식자의 체적은 작은데 포식자만 일방적으로 덩치를 키운다면 기아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며, 가혹한 자연환경에 천적은 많아 에너지 효율과 자손의 수가 중요시된다면 덩치가 작은 게 유리할 것입니다.
반대로 해당 생물군이 수컷 간의 경쟁이 치열한 번식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수컷이 덩치를 적극적으로 키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후적으로 먹이활동이 좋은 열대지방과 달리 겨울이 긴 한대지방은 겨울을 버텨낼 피하지방이 대량으로 필요할 수 있다는 이유가 있어 영양 저장을 위해서도 큰 쪽이 유리합니다.
이렇게 최적크기를 결정하는 수만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정온동물의 보온에는 화학적 반응 및 털의 생성 등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기초대사량으로 들어가는데 체적이 큰 경우 상당한 보너스를 받을 수 있고 이 보너스가 체구를 키움으로서 얻는 플러스는 그대로 보존한 채로 마이너스는 상당히 상쇄해 크기가 커진 상태에서 새로운 균형크기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이게 현실 생태계에서도 자주 볼 수 있을 만큼 체적-보온관계의 보너스가 영향력이 크기에 의미 있는 이론으로 거론되는 것입니다.
흔히 생물시간에는 추운 곳에 사는 동물일수록 말단부가 작아지는 알렌 법칙과 합쳐서 알렌-베르그만 법칙이라고 합니다. 북극에서 서식하는 북극곰, 북극여우, 북극늑대 등은 다른 지역의 곰, 여우, 늑대들에 비해 귀나 코의 크기가 작은 편인데 이게 그 사례 중 하나입니다.
2. 675년 덴무 덴노의 육식 금지령!
일본의 제40대 천황.
일본이라는 국호, 천황이라는 군주명을 비롯해 전근대 시절 일본의 체제를 완성시킨 인물이자 초기부터 현재까지 천황이 별 실권을 쥐어본 적이 없는 일본 역사에서 천황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강력한 전제 권력을 행사한 천황이었습니다.
조메이 덴노(舒明天皇)와 고교쿠 덴노(皇極天皇)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덴지 덴노로 즉위하게 되는 나카노오오에 황자(中大兄皇子)와는 친형제였다. 황후 우노노사가라노 히메미코(鸕野讃良皇女)는 후에 지토 덴노(持統天皇)로 즉위했습니다.
덴무 천황의 휘는 오오아마(大海人)였습니다. 어려서 오 아마씨(凡海氏)로부터 양육받은 데에서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향한 새로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덴무 천황은 호족과 지샤(절과 신사)가 토지와 인민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일체 부정하고, 여러 호족을 천황 중심의 관리 질서에 짜 넣어 국가의 지배를 관철하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우선 덴무 4년(675년) 2월 15일, 선대 덴지 3년(664년)부터 모두에게 인정되었던 부곡과, 황족 · 신하 · 사원에게 인정되었던 산택 · 섬과 포구 · 임야 · 연못을 다시 거둬들인다는 조를 내렸습니다.
나아가 현지의 유력자가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부정하고 관위나 관직, 공적에 따라 개인에게 봉호(식봉)를 주는 형식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러한 봉호 도입 자체는 덴무 천황 이전부터의 것이었지만, 내막의 전환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5년(676년) 5월 14일에 서쪽 지방에 있는 봉호의 세를 거두어 도고쿠로 옮기고, 한 사람을 장기간 같은 장소에 봉하는 것으로 생겨나는 피봉자와 현지와의 주종적 관계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8년(679년) 8월 2일에 '쇼킨'(小錦) 이상의 황족과 신하에게 일괄적으로 식보이을 지급함으로써 신제도로의 전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를 전후해 8년(679년) 4월 5일, 사찰의 식봉 조사를 명하고, 9년(680년) 4월에 그 연한을 30년으로 한정했습니다. 11년(682년) 3월 28일에 이르러 식 봉을 없애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뒤로도 봉호가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뭔가 제도 개정(아마 식 봉의 관리에의 관여를 금지하는 조치)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여겨집니다.
황제의 의도는 귀천의 차이를 자신이 정한 질서대로 정하려 한 것이었고, 한미한 씨족의 '가바에'(姓, 성)를 승진시켜 우대하는 조치를 취하며 덴무 13년(684년) 10월 1일, 고대의 가바네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편성했습니다. 이것이 야쿠사노 가바네(八色之姓, 팔색지성)입니다. 황족에 준하는 가바네를 마히토(眞人), 기존의 오미(臣)를 아손(朝臣), 무라지(連)는 스쿠네(宿禰) 등으로 삼고, 여기에 진신의 난에서 세운 공적도 가미하여 가바네를 정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화폐로 여겨지는 부본 전(富本錢)이 주조된 것도 덴무 천황의 시대였습니다.
덴무 천황은 일본 고대의 전통적인 문예·전승을 발굴하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외래의 것이 배척된 것은 아니었지만, 덴무 이전과 이후의 여러 천황들과 비교해 볼 때, 일본 토착 문화의 발굴과 정돈을 향한 그의 노력은 현저합니다. 야마토(倭)라는 국호를 '日本'으로 정하고, 군주의 호칭을 '天皇'으로 칭한 것은 덴무가 최초라는 것이 유력합니다.
또한 덴무 천황은 그전까지 민간에서 전해지던 습속을 적극적으로 포용해 그것을 국가 단위의 제사로 소급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후술 할 신도의 제사를 포함해 후대까지 전통으로 전해진 주요 궁정 의식의 대부분은 덴무 천황에 의해 창시(혹은 집대성)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세치노마이'(五節舞)는 그 확실한 예로 꼽히며, '니이나메노마쓰리'(新嘗祭)를 국가 제사로 승격시켜 '다이죠사이'(大嘗祭)를 마련한 것도 덴무 천황이었습니다.
예술적으로도 살펴보면, 덴무 4년(675년) 2월 9일에 기나이와 그 주변 지역에서 노래에 뛰어난 남녀·난쟁이·기인들을 궁정에 모으도록 명령하고, 4월 23일에 그들에게 녹을 주었습니다. 6년(677년)에 처음으로 시•부(詩賦)를 지었다. 14년(685년) 9월 15일에는 뛰어난 노래와 피리 연주를 자손에게 전하도록 명령했고 이듬해 15년(686년) 1월 18일에는 배우와 가인(歌人)들에게 포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덴무 10년(681년) 3월 17일에 황태자와 여러 신하들에게 역사책을 편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훗날 완성되는 《일본서기》 편찬 사업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히다노 그저께(稗田阿礼)로 하여금 역대 천황의 계보와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구사(舊辭) 등의 기록을 암송하도록 명령했는데, 이것이 오노노 야스마로에 의해 성문화된 것이《고사기》였습니다. 모두 천황 사후에야 완성되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사서로 꼽힙니다. 한편 천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덴무 천황은 재위 4년(675년) 1월 5일에 일본 최초의 천문관측기구인 점성대(占星臺)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덴무 4년 4월 17일(서기 675년 5월 19일), 천황은 <육식금지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4월 1일(5월 3일)부터 9월 30일(10월 27일) 동안 어린 물고기를 잡거나 먹지 말고 보호할 것과 다섯 종류의 가축(소 · 말 · 개 · 원숭이 ·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 당시에 <육식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제대로 된 육식을 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즉위 전에 요시노로 낙향하기에 앞서, 승려로서 출가했던 경력이 있었던 천황은 재위 2년(673년) 3월에 가와라데라(川原寺)에서 《일체경》(一切經)을 필사하게 하는 대규모 사경 작업을 행했습니다. 5년(676년)에는 전국에 사자를 파견해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인왕경》(仁王經)을 설법하게 했으며, 8년(679년)에는 궁중 및 야마토쿄(倭京)의 24개 절에서 《금광명경》을 설법하게 했다.
사원 건립에 있어서는 《일체경》사경을 명했던 덴무 2년(673년) 12월 17일에 미노노 오오키미와 기노 가타마로(紀訶多麻呂)를 조고시대사사(造高市大寺司)에 임명하고 선대 조메이 천황이 지었던 백제대사(百濟大寺)를 다케치(高市)로 옮겨 다카이치노오테라(高市大寺, 고시대사)로 삼았습니다. 9년(680년) 11월 12일에 황후의 병에 임해 야쿠시지(藥師寺) 건립을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덴무 14년(685년) 3월 27일, 천황은 집집마다 불사(佛舍)를 짓고 예배·공양하라는 조를 내렸습니다. 이 무렵까지 기나이를 제외하고 다른 지방에 불교 사찰의 수는 적었지만, 덴무·지토 조에 이르러 전국에 우지데라(氏寺, 씨사)가 활발히 축조되었습니다. 유적에서 발굴된 기와를 통해, 중앙에 위치한 소수의 사찰마다 지역을 분담해 건설을 지도하는 등 정책적인 지지가 이루어졌음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황의 불교 보호는 승려들에게 사찰에 틀어박혀 천황이나 국가를 위한 기도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불교를 국가에 종속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국가신토가 너무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견제하고자 했던 천황의 '국가불교'인 셈이었습니다. 덴무 4년에 여러 사찰에 내려졌던 산림과 천택을 거두어들이고 8년에는 식 봉을 내리는 등 사찰의 수입을 국가가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중앙통제기관으로는 스이코 천황 때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던 승정·승도 등을 부활시켜 승강제를 정비했습니다.
덴무 천황은 종교나 초자연적인 힘에 관심이 많았고, 신령이나 부처를 믿는 믿음도 두터웠습니다.
《고사기》에는 덴무 천황이 꿈속에서 들은 노래의 내용을 풀이하여 한밤중의 물에 던져, 자신이 황위에 오를 것을 알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천문둔갑에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진신의 난에서는 스스로 점을 쳐서 장차 천하가 양분될 징조를 예측했다거나 여러 신들에게 기도하여 뇌성폭우를 그치게 하는 등 능력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도교적인 기능입니다.
즉위 뒤에도 종교나 의식에 계속 관심을 두었고 운세를 알아보거나 신령에게 기원하여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예언자적 능력은 후세에 천황이 사람들 사이에서 신이 나 다름없는 카리스마성을 몸에 지니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675년 덴무 덴노가 육식을 금하도록 선포한 명령으로, 1872년 메이지 덴노가 해제할 때까지 약 1,200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했습니다.
3. 이어지는 육식금지에 대한 역사
당나라·백제를 통해 일본에 불교가 유입되어 신토 와 함께 자리 잡자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675년 덴무 덴노는 농경 기간 동안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육식을 금지했습니다. 육식금지령 때문에 일본인들은 생선 같은 수산물, 계란, 채소, 곡물 위주로 식사했습니다. 당시엔 생선과 고기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물을 키워도 잡아먹을 용도로는 키우지 않았습니다. 소는 오직 농사에만 사용했고 말은 교통수단으로만 사용했으며 닭은 알람시계, 계란 생산에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키우다가 죽으면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고 기름을 짜내 불 붙일 때 사용했지만 절대로 살을 발라내 먹지 않았고 나머지 부위는 땅에 묻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일본은 인구에 비해 농사지을 토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농경지를 축소하면서 까지 고기생산량을 늘린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었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고기용 가축을 키운 것도 메이지 유신 이후 병합한 홋카이도가 목축지로 대규모 가축사육이 가능해지면서입니다.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고 메이지 유신을 선포함에 따라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에 따라 육식금지령도 1197년 만에 해제되었고 천황이 직접 공개적으로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다만 1000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이라 반발이 심해 자객이 궁궐에 침입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일본전골, 돈가스 등 경양식이나 일본식으로 개량한 고기요리를 먹어 서서히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갔습니다. 소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과장광고가 나왔을 정도로 이전과는 달라졌습니다.
육식이 금지되어 제대로 된 도축은 고사하고 죽은 소마저 죄다 태워버리는 일본이었습니다.
양갱이라는 건 원래 이름대로 양고기에서 나온 선지로 만든 요리였는데 일본에서 선지를 팥으로 대체해서 만든 것이 현재의 일본식 양갱이 되었습니다. 만두도 중국은 두꺼운 피에 여러 고기, 야채, 향신료를 넣어 주식으로 먹고 한국은 얇은 피에 고기, 야채, 두부, 당면을 넣어 반찬으로 먹지만 일본은 밀가루 피 안에 팥앙금을 넣어 간식으로 먹었고, 이것이 만쥬입니다.
또한 전근대 일본인들의 평균 키는 남녀 모두 한국인들의 평균 키보다 약 7cm 정도는 작은 편이었는데, 이 육식금지령의 영향도 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의 턱이 주변민족에 비해 갸름하고 그에 따라 덧니 같은 부작용이 흔한 것 역시 이 육식금지령의 영향이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고래고기를 즐겨 먹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고래는 당연히 어류도 아니고 육질도 포유류의 그것과 같지만 물에 살아서 육지동물이 아닌 데다 생긴 것도 물고기랑 거의 똑같이 생겼다 보니 물고기라는 핑계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기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령 후에도 먹을 사람은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온갖 방법을 써서 법망을 피해 육식을 했기 때문에, 일단 집권층부터 약재용이니 뭐니 이런저런 꼼수로 고기요리를 즐겼으며, 일반 백성들까지도 다양한 편법으로 법망을 피해 고기를 즐겼습니다. 가령 오리고기는 물에서 나오니 생선이라는 식으로, 멧돼지고기는 산에서 나오니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던지 산에 사는 고래이므로 생선이라던지. 굶주림에 몰래 도축해 먹거나, 신분에 상관없이 질병 치료형식의 약으로 삶거나 구워서 먹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역사적 인물들 중에서도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전국시대 때 오다 노부나가가 엔랴쿠지를 공격하면서 "무슨 스님들이 매일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 비단옷을 입고 여자를 끼고 사냐?"비판했고 스님으로 출가한 다케타 신켄도 죽기 몇 년 전부터 약으로 매일 닭을 잡아서 삶아 먹었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록도 있습니다. 참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느 날부터 다케타 신켄의 전용요리사가 닭을 잡지 않고 있다는 간자의 보고를 듣고 신켄이 죽은 것을 눈치챘다고 합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먹는 것은 다 알음알음 먹는 것이다 보니 전반적으로 육식 문화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일본에는 제대로 된 토착 고기요리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일본 고유의 고기요리라 할 만한 일본전골마저도 본래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두부, 우무, 버섯 등만 넣어 만든 채식 요리였다가 나중에 고기가 추가된 것입니다. 계란을 넣은 것도 고기 냄새가 안 익숙한 일본인이 이를 감추기 위해 넣은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근대기 발생한 고기 요리는 대부분 한식(불고기, 호르몬 등), 중식(칭기즈칸 요리, 교자, 라멘 등), 양식(돈가스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현대에는 육식금지 자체가 사라진 만큼 일본 사람들도 고기를 잘 먹습니다. 근래에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한국 요리에도 육류가 많은 편입니다.
고려도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문화가 쇠퇴했습니다. 다만 일본처럼 정부가 나서서 금지하는 건 아니고 대놓고 육식하는 것을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생긴 정도. 이로 인해 도축 기술이 쇠퇴해 중국 사신에게 대접할 고기를 두들겨 패거나 절벽으로 떨어트리거나 산 채로 불태우고 핏물도 제대로 안 뺀 것을 대충 구워서 만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고려 초기였고, 유목민족인 원나라의 간섭을 받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육식이 성행하였으며 고려를 무너뜨리고 개창한 조선은 숭유억불로 불교문화를 탄압했기에 오히려 육식이 더 융성해졌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 조선 침공을 위해 전국에서 군사들을 징발해 시모노세키 군항으로 집결시켰는데 당연히 전국각지에서 모인 이들이었기에 바다를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고 시모노세키가 당시 복어로 유명한 지역이라 독을 제거하지 않고 복어를 요리해 먹다가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죽는 군사들이 생겨나자 복어금식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3. 1197년 동안 이어져온 육식금지령의 결과, 치열이 망가져, 많은 덧니 등장!
이러한 장장 약 1,200년간이나 육식을 금지한 일본은 성장이나, 체형의 왜소함을 가져왔으며, 질기고 딱딱한 음식을 장기간 접하지 못하여, 씹는 근육이 매우 약해졌으며, 이로 인한 치열의 훼손이 심각해졌다고 합니다.
그런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고른 치아가 아닌, 치열이 엉망이 되어 덧니등의 부작용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골고루 먹는 습관이야말로 건강을 유지함과 동시에 고른 치열과 덧니도 예방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일본인중 덧니가 유독 다른 나라에 비하여 많은 이유를 알아보는 시간을 갖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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