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Anne of the Thousand Days)-천일의 앤

 

1. 튜더왕조의 시작

 

오늘의 제목에 다가가기 전에 먼저 중세 영국의 튜더왕조에 대한 소개 먼저 해 봅니다.

 

영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이자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가문이고, 절대 왕권으로 유명합니다.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조가 바로 이 왕조입니다.

 

영국의회
영국의회

 


1485년, 헨리 튜더가 장미 전쟁을 끝내고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이후로는 직계 후손이 없어 단절되어 막을 내립니다.

다만 뒤를 이은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 제임스 1세가 모계로는 헨리 튜더의 피를 잇고 있어서 현재 영국 왕실에까지 튜더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튜더 가문은 본래 웨일스의 귀족 가문이었으며, 단순한 귀족이 아닌 웨일스 공가(公家)였던 아베르프라우 왕가의 방계후손이었지만, 잉글랜드 중앙정계에선 약소 가문에 가까웠습니다.

 

웨일스 공가 계보도 그런데 헨리 7세의 조부였던 오웬 튜더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국왕 샤를 6세의 딸로,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5세의 왕비이자 헨리 6세의 모후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재혼하면서 듣보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윽고 오웬과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인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가 태어났으며, 이 중 에드먼드 튜더가 바로 헨리 7세의 친아버지입니다.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는 자신들의 이부형이었던 헨리 6세로부터 공식적으로 형제임을 인정받았고, 헨리 6세는 에드먼드와 재스퍼에게 각각 리치먼드 백작과 펨브로크 백작 작위를 하사했습니다.

 

당연히 에드먼드와 재스퍼 형제는 자신들을 후히 대우해주는 이부형을 따라 장미전쟁 내내 철저히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섰습니다.

 

 



무엇보다 헨리 7세가 왕위를 주장한 근거는 '넓게 보면 나도 플랜태저넷의 혈통입니다. 하지만 헨리 7세의 혈통은 모계로 봐도 플랜태저넷과는 상당히 좀 거리가 있는 상태였으며, 이에 헨리 7세는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여 요크와 랭커스터 간의 융합을 이뤘습니다.

 

헨리 7세가 왕위에 등극할 무렵엔 이미 플랜태저넷 혈통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을 벌이는 바람에 사실상 후손들이 모두 도륙나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헨리 7세의 왕위에 위협을 끼칠 만한 왕족은 리처드 3세의 조카인 워릭 백작과 링컨 백작정도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워릭 백작과 링컨 백작 모두 철없는 소년들이라 큰 위협은 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헨리 8세가 가톨릭-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청교도의 삼자 구도를 짜면서 아주 피곤한 시기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젠트리와 요먼 세력이 성장하면서 상업이 발달하여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와 스페인 세력을 물리쳐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할 기초를 쌓았습니다.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대영제국의 시작을 알리면서 영국 정부의 재정이 건실해지던 시기였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토마스 모어, 존 던 등 지금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문학가들이 활동했으며, 무엇보다도 영문학계의 본좌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 시기 사람입니다.

 

활발하고 진취적인 분위기의 튜더 왕조의 문화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탄(Elizabethan)' 문화라고도 이름 붙여졌습니다.

대체로 영국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로 꼽힙니다.

 

헨리 8세의 경우 막강한 왕권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나 복잡한 사생활과 결혼을 6번이나 한 덕에, 대중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고있고 그의 인생은 오늘날까지도 대중매체의 인기 소재로 자주 다뤄집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중 한 명입니다.

 

이 엘리자베스1세의 어머니가, 왕비를 딱 천일동안만 하고 남편인 헨리 8세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 오늘 이 글의 주인공 앤 왕비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왕이 의회를 권력으로 찍어누른 시대였습니다.

 

장미 전쟁은 잉글랜드에서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대귀족간의 내전이었고 여기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조리 죽어나가면서, 그들의 힘은 물론 숫자 자체가 엄청나게 줄어들었고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의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로 이에 비례해 왕권은 아주 강력해졌습니다. 무엇보다 헨리 7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까지의 왕의 권력은 튜더 왕조 이전에도 이후에도 꿈도 못 꿀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물론 당연히 프랑스, 조선, 중국보다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절대왕정이라 불릴만했습니다.특히 이때 영국 국왕은 의회를 재정/돈, 군사 등으로 찍어 누르고 마음대로 국정을 주도했습니다.

 

심지어 헨리 7세/헨리 8세,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 때 의회는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강력했던 절대왕권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 후, 제임스 1세 시대의 중기부터였으며,그리고 완전히 사라진 건 의회에게 완벽하게 패한 찰스 1세 때입니다.

 

 

 

오래전, 어릴 적 봤던 영화 천일의 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 잘 만든 영화였고, 특히나 각본이 탄탄한 영화라고 느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영상의 내용들이 많이 남습니다. 그때는 헨리 8세의 모습이 폭군이나 절대군주의 모습으로만 보였는데, 훗날 여러 다른 영화나 자료들을 보면, 영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국민들에게는 정치를 비교적 잘 한 정치가이며, 현재의 영국 영토의 기초를 만든 왕이라는 내용을 한참 뒤에 알게 됩니다.

 

2. 영국성공회의 탄생

 

성공회(聖公會)는 영국의 잉글랜드에서 기원한 개신교 교회입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용(Via media)을 표방해 왔으며, 그리스도교 중에서 가톨릭, 정교회에 이어 3번째로 교세가 크며 165개국에 걸쳐 약 8,500만 명의 교인이 있습니다. 한국의 성공회 교회는 대한 성공회입니다.

 

성공회의 발상지인 잉글랜드에서는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 이후 오늘날까지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 늘 국교회(established church)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잉글랜드 성공회는 곧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 C of E)로 불립니다.



성공회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확장에 힘입어 그레이트브리튼 섬 밖의 영연방 국가들에 널리 퍼졌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신자 약 1,800만 명으로 가장 큰 그리스도교 교단입니다. 호주·뉴질랜드에서도 가장 큰 그리스도교 교단이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6번째로 큰 그리스도교 교단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리스도교 교단 중 제일 많은 12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고 워싱턴 D.C. 에는 국립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이 있는 등 교세와 인지도가 높은 편입니다. 미국의 주류 7대 개신교(Seven Sisters of American Protestantism) 중 하나로 분류됩니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에도 적잖은 많은 신자들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홍콩에서는 신자 수 약 2만 9,000여 명으로, 교세가 크지는 않으나 가장 역사가 오래된 그리스도교 교단입니다. 구 하와이 왕국과 메리나 왕국 그리고 독립 전 아일랜드의 국교였습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교회가 된 성공회, 그 탄생의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3.헨리8세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절대군주이자 두 번의 대승으로 북쪽의 숙적 스코틀랜드 왕국을 제압함으로써 훗날 브리튼 섬 통일의 기초를 닦았으며, 영국 국교회를 성립시켜 이후 영국 역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단순히 호색한이나 난봉꾼 정도로 기억해서는 절대 안 될 영국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 영국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귀족들을 거의 전멸시킨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 아서 튜더의 죽음(15세 사망)으로 왕좌에 올랐고, 전 자녀 셋은 모두 왕이 되었으며,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왕입니다.

​장미 전쟁으로 완전히 도륙 난 플랜태저넷계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습니다. 스페인 트라시 타마라 왕실 출신의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잉글랜드를 독립시켜, 잉글랜드 국교회(현 성공회) 설립함으로써, 이후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 기독교권의 판도 자체에도 무시 못 할 영향력을 미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헨리 8세의 형 아더는 15세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린 부인 캐서린은 스페인의 공주였으며, 졸지에 과부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왕위를 물려받은 헨리 8세는 아버지 왕의 간곡한 요청으로 형의 부인(캐서린)과 결혼을 합니다. 지금도 근친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당시의 영국에서도 근친혼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스페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형의 부인 형수(캐서린)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헨리 8세는 본인이 원하는 결혼이 아니었던 만큼 결혼생활이 즐겁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욱, 아들을 낳지 못하여 관계는 더더욱 악화됩니다. 

 

캐서린 왕비의 시녀 앤 볼린과 눈이 맞아 결국은 형수이자 첫 번째 왕비였던 캐서린과 이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가톨릭 국가에서는 이혼이라는 것이 성사가 되지 않았기에 기막힌 아이디어를 냅니다.

​형(사망한 아서왕)이 캐서린과 결혼한 것은 맞지만, 첫날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당시 교황도 이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판단했지만, 결국은 이혼을 허락해 줍니다.

​하지만, 캐서린 왕비의 시녀 앤 불린 과 눈이 맞아 재혼을 하려고 또다시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번에는 교황도 허락을 해주지 않습니다. 

이혼 자체의 부당함도 있지만, 당시의 가장 강력한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의 왕의 이모가 바로 헨리 8세의 부인인 캐서린이었기에, 아무리 교황이라 하더라도 신성로마제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헨리 8세는 상상 못 할 결정을 내립니다. 교황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 하면서 교황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교황도 헨리 8세를 파문합니다.

헨리 8세는, 우리가 따로 교회를 만들면 돼!라고 하면서 만든 것이 현재의 성공회라고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만든 것이 성공회지만, 가톨릭과 개신교의 장점 등을 모두 반영하고,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으로 이후 대영제국의 성공으로 전 세계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서 현재의 성공회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헨리 8세는, 젊은 시절부터 사냥, 마상 찬 시합, 춤, 예능 같은 야외활동을 좋아했고, 심지어 정무를 보는 것보다 더 즐겼다. 체념한 캐서린의 묵인하에 문란한 생활을 일삼았습니다.

동시에 당시 왕족들 중에서 공부도 상당히 잘해 라틴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가 유창했고, 당대의 석학들과 천문학과 신학을 토론했다고 하며, 최고의 지성이었던 네덜란드의 에라스뮈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약간 얘기가 옆으로 세어 다른 얘기로 돌아갑니다.

​세종대왕이 여러 치적을 쌓고, 당대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건,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방원은 재임 전부터 재임 시까지, 형제와 사돈에 8촌을 가리지 않고, 장차 불씨가 될만한 정적이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모두 다 없앴습니다.

그래서 훗날 세종대왕이 물론, 본인의 뛰어남도 있지만, 불씨가 생길만한 정적들을 아버지 이방원이 모두 없앴기 때문이라는 얘기는 어느 정도 맞는 얘기 같습니다. 

​헨리 8세도 숙청은 혈통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가 혈통이 섞이지 않은 전통 대귀족 들도 대거 숙청했습니다.

그 결과 다음다음 대인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잉글랜드의 전통 귀족 가문은 남작까지 합쳐야 수십 개 가문에 불과했고, 공작 가문은 장자 서리 백작이 처형당하고 손자도 훗날 처형당하는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 하나만 남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후의 재혼에서 얻은 아들들은 줄줄이 요절이나 사산이 되었고, 딸인 메리 공주만 살아남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면 헨리 8세가 그냥 정신병자처럼 보이지만 그 긴 치세 기간 동안 막장으로만 일관했다면 영국 국민들로부터 '해리 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나름대로 인망을 얻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변인들과 신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궁정의 일을 알 리가 없는 백성들에게는 호탕하고 강력한 왕으로 여겨졌습니다.

​헨리 8세의 치세는 평가가 많이 갈리지만 잉글랜드가 최초로 열강의 위치에 오른 시기로 통치에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귀족들보다는 학식으로 무장한 신규 계층을 등용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호평도 받고 있다. 앞서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푸줏간 백정의 아들이었고, 토머스 크롬웰은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으나 고등교육 하나로 재상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헨리 8세는 집안에서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과의 연이은 충돌이나 아일랜드 원정을 비롯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오랜만에 출현한 대외정책과 외교에 굉장히 적극적인 왕이었습니다. 

​헨리 8세의 저런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잉글랜드 또한 나름대로 국제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는 깊은 인상을 받을 만도 했을 것입니다. 비록 헨리 8세가 대륙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지만 튜더-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잉글랜드는 이후에도 유럽 정세에 군사적•경제적으로 계속 관여하며 열강 행세를 해 유럽에서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는데 그 시초는 헨리 8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선왕 헨리 7세 시절부터 추진되던 해군 증강 정책의 기조를 이어받아 조선 시설을 정비하는 등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헨리 8세의 최대 치적으로 꼽힙니다. 헨리 8세는 즉위 초 5년 만에 해군의 규모를 선왕 때보다 4배나 증강시켰고, 이를 발판으로 유럽에서 잉글랜드가 열강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546년에는 해군 총을 신설하여 영국이 해양강국으로 뻗어나가는데 필요한 정책적 발판도 만들어냈다.

 

이런 의도에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한 강력한 전함인 메리 로즈호를 만들었다. 이 전함을 건조한 목적은 헨리 8세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만든 메리 로즈호는 34년간 전장에서 활약했지만 1545년 소렌토만 해전에서 제대로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헨리 8세가 보는 앞에서 홀라당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훗날 수백 년이 지나서야 인양에 성공했는데 인양해놓고 보니 실로 공을 들인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메리 로즈 호의 대포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제일가는 대포 장인에게 의뢰해 사정거리가 다른 대포보다 월등히 나은 것이었고, 배의 설계구조도 이전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시도해서 어느 배보다도 거대하고 초강력 한 전함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내부에서 온전하게 장궁들이 출수되면서 영국 장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재 메리 로즈 호의 선체와 유물들은 포츠머스 히스토릭 독야 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메리 로즈 호의 침몰은 소렌토만 해전 당시 대포 발사를 위해 열었던 포문을 닫지 않아 열린 포문으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서 선체가 중심을 잃고 침몰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대포 포문을 배 밑까지 설치하고, 이 대포가 너무 무거웠던 데다가 너무 많은 인원을 태운 탓도 침몰 원인으로 한몫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메리 로즈호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엄청났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4. 천일의 앤

 

헨리 8세는 모두 6명의 부인과 결혼과 이혼, 재혼을 계속했으며, 본인의 주체 못 하는 여색으로 인하여, 계속하여 결혼 중에도 주변을 기웃거렸으며, 캐서린의 시녀 앤 불린, 앤 볼린의 시녀 제인 시모어 등 주로 왕비의 주변 인물인 시녀들과 눈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1번째 왕비인 캐서린(죽은 형의 부인, 형수)과 이혼 후,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볼린과의 재혼, 이후 앤 볼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 등과의 과정에서 오늘의 주인공, 앤 불린은  정확히 1,000 일 동안 왕비에 있었으며, 결국엔 불륜이라는 누명으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딸 엘리자베드가 태어납니다.

이 엘리자베스가 훗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포문을 연 엘리자베스 1세이고, 얼마 전 사망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조가 됩니다.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헨리 8세가 이혼 후 모두 성 밖으로 쫓겨납니다.

하지만, 마지막 6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는 가장 현명한 왕비였다고 합니다. 헨리 8세에게 지금까지 헨리 8세와의 낳은 전처의 자식들을 모두 성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같이 살자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엘리자베스도 이때 성안으로 들어옵니다.

 

역사의 가정은 없다지만, 아마도 이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의 요청이 없었고,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다시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여생을 성 밖에서  보냈다면, 아마도 대영제국의 탄생이 있었을까? 당대의 최고 전력인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끝장낼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져 봅니다.

아울러, 영국 성공회의 탄생 과정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