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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읽었던 윌리엄 아담스의 일본편지라는 책에 관한 (실화) 내용을 적어 보려 합니다.

영국인 출신으로서 배가 난파되어 일본에 홀로 도착하여 당시의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으면서 외교고문으로 벼슬을 받고, 일본여자와 결혼 후 아이들을 낳으며 18년간 일본에 살았던 실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일본의 실력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난파된 배의 규모와 크기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당시의 일본의 조선술로는 이러한 배를 만들 기술이 없었기에 , 윌리엄 아담스로부터 각종 조선업에 관한 기술을 습득하고, 배안에 있었던 각종 무기, 탄약등에 대해서도 기술습득을 합니다.

윌리엄아담스의 일본편지
윌리엄아담스의 일본편지

윌리엄 아담스라는 영국인 항해사와의 인연으로 당시 일본은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뜨게 되며  조선업, 무기, 탄약등에 대한 기술을 습득하게 되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또한 윌리업아담스는 평소 아시아를 생각하며 미개한 나라들로 인식을 했었는데, 도착한 일본은 거리에 쓰레기 하나없고, 개개인의 가정집도 상상이상으로 깨끗하며, 나름 문명화된 일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오늘은 뜻하지 않게 표류하게되어 일본에 도착 후 18년간이나 살면서 당시 중세의 모습을 서양에 최초로 전파한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에 대해 소개합니다.


1.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 1564년 9월 24일 - 1620년 6월 16일)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교고문을 지냈던 영국 출신의 항해사, 항구도선사(導船士) 겸 무역인입니다. 귀화하여 일본여인과 결혼하였으며, 막부로부터 영지까지 받게 됩니다. 일본이름은 미우라 안진(일본어: 三浦按針)이란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이력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주 태생이며, 선원인 아버지를 여의고 12살 때 런던으로 상경하여 조선업자인 니콜라스 디킨스의 제자로 들어갑니다.

조선술보다 항해술쪽에 흥미를 느끼게 된 그는 1588년 도제 간 의무기간이 끝나자 영국해군에 입대하여 화물보급선의 선장으로서 에스파냐 무적함대와의 전투인 아르마다 해전에 참전합니다.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항해중 함께 일하게 된 네덜란드 선원들과 교류하게 된 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극동지역항해를 위해 숙련된 항해사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 동생과 함께 지원하게 됩니다.

선단은 총 5척의 배로 구성되었으며, 애덤스는 그중 호프('희망'이란 뜻) 호의 항해사로 채용되었고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기 전에 리프데 호로 재배치되었습니다.

항해는 매우 험난하여 2척이 동인도제도와 에스파냐에 의해 나포되었고, 한 척은 항해를 단념하고 로테르담으로 돌아가 버리게 됩니다.

남은 것은 호프호와 리프데호의 두 척뿐이었으나, 태평양 항해도중 호프호가 침몰하여 최종적으로 리프데호 한 척만 남게 됩니다.

남은 리프데호의 선원들도 식량보급을 위해 정박한 곳에서 각종 풍토병에 감염되거나, 현지인의 습격을 받아 인명이 손실, 출항당시 110명이었던 선원은 24명으로 줄게 됩니다.

애덤스의 동생 토마스도 현지인의 습격을 받고 죽게 됩니다.

리프데호도 일본 큐슈 동북부의 분고노쿠니의 우스키시란 곳에 표류하게  됩니다.

-토구가와 이에야스와의 만남

1600년 4월 19일, 분고노쿠니 우스키시에 표류한 리프데호는 자력으로 상륙이 불가능했기에 우스키시 성주 오오타 카즈요시가 제공한 소형 배를 타고 육지에 상륙하게 됩니다.

오오타의 보고를 받은 나가사키 부교 테라자와 히로타카는 애덤스 일행을 구속하고 리프데호에 선적되어 있던 각종 무기와 탄약 화물을 압수한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알리게 됩니다.

이때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은 이들이 해적이니 처형하라고 부추겼으나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시에 따라 중태에 빠진 선장을 제외한 나머지 선원들은 오사카로 이송되었습니다.

5월 12일 이들을 접견한 이에야스는 장로교와 영국 성공회를 믿는 네덜란드, 영국과 로마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 간 종교 대립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이들의 말을 신뢰하게 됩니다. 몇 번의 접견 후 이에야스는 이들을 놓아주고 자기 영지가 있는 에도로 초청합니다.

-일본생활

애덤스는 귀국을 희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에야스는 쌀과 봉급을 주어 그를 달래고 외국사절과의 만남이나 외교교섭 등에 통역 및 상담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또 이 시기에 기하학, 수학, 항해술 등의 서양지식을 막부관료들에게 가르쳤다고도  합니다. 결국 귀국에 대한 희망을 접은 그는 막부에 물건을 납품하고 있던 어용상인의 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한편 에도만에 계류되어 있던 리프데호가 침몰해 버리자 조선장인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서양식 배를 건조할 것을 요구 받게 됩니다.

이미 조선술을 상당부분 잊고 있던 애덤스는 사양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본 최초의 조선용 독을 설치하고, 약 80톤급의 배를 새로 건조하게 됩니다.

이에 크게 만족한 이에야스는 더 큰 대형선박의 건조를 지시하여 1607년에도 120톤급의 선박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이때의 일로 일본의 조선업분야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됩니다.

(이 배는 나중에 일본에 표류한 필리핀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 가 이에야스로부터 배를 빌려 산 부에나 벤투라호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 공적과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250석규모의 하타모토(1만 석 미만의 가신)에 명하고 사무라이의 신분으로서 칼을 허리에 찰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사가미 국에 영지를 수여했습니다. 이로써 애덤스는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사무라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성 미우라는 영지가 있는 미우라(三浦)반도에서 따왔으며 이름 안진(按針)은 그의 직업명에서 유래(도선사: 일본어로 水先案内人)에서 따왔습니다.

일본에 안착하여 실력자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무한 신뢰로 외교고문까지 오른 인물이며,  무려 18년간이나 살면서

이에야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애덤스는 일본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얻었으나, 이미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까지 있으며, 당시의 벼슬로서 편안히 살고 있는 현실을 감안, 귀국(영국)을 포기하고 결국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619년 여름 동남아시아 무역항해에서 돌아온 뒤에 병에 걸려서, 1620년 봄에 히라도토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은 윌리엄 아담스의 일본편지라는 책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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