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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인간병기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감동실화!
6.25전쟁에서 가장 강했던 군대,종전후에도 한국에 남아 3년간 전쟁고아를 돌본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감동실화!
6.25 무패 신화'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에티오피아는 최근 10여 년간 연평균 1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급격한 경제 성장 뒤에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있습니다
한국식 성장 모델을 벤치마킹한다는 이 국가, 에티오피아와 만남은 6·25전쟁 때부터 시작합니다
6.25 전쟁 때 지상군 파병한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육이오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전투병을 파견한 16개국은 미국 등 서방국이 대부분이었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에티오피아도 한국을 돕고자 전투병력을 파병했습니다 이들은 6.25 전쟁에서 253전 253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황실 근위대를 중심으로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하고 강뉴부대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강뉴는 에티오피아어(암하라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격파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셀라시에는 출정식에서 장병들에게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사지가 멀쩡한채로 절대 돌아오지 말아라”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셀라시에가 한국에 파병을 한 것은 에티오피아가 겪은 아픔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아 국토를 점령당했으며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1941년 수단에서 결성된 에티오피아 망명군이 영국군과 함께 이탈리아군을 몰아냈습니다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 역사를 통해 국제사회 집단안보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후에 6.25 참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1951년 5월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는 미군 7사단에 배속, 같은 해 9월 강원 화천군 적근산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952년 10월 철의 삼각지 공방전에서 단 한 차례도 고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1953년 7월 정전 때까지 연인원 3518명(1956년까지 주둔 기간을 포함하면 6037명)이 참전해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으나 포로는 없었습니다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부상한 동료를 포기하지 않았고, 전사한 동료의 시신도 진지로 옮겨왔습니다
동료가 적에 붙잡히면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했으며 이에 부산 유엔군 묘역에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없는 이유입니다 용맹하게 싸운 에티오피아 군인 중에선 한국에도 알려진 인물이 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2017년 8월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강뉴부대원이던 구르무 담보바 이병을 선정한 바 있습니다 담보바 이병은 1951년 참전해서 강원 화천군과 철원군 일대에서 공을 세웠고 전투 중 허벅지와 엉덩이에 관통상을 입어 귀국했지만 다시 참전했습니다 당시 강뉴부대에는 담보바만큼 무반동총을 잘 다루는 병사가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와 혹한의 고통을 또 겪어야 하는 것이 두려웠지만 두 번째 파병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강뉴부대는 1956년까지 주둔하며 평화를 지키고 전후 복구를 도왔습니다
하지만 참전용사들은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1974년 공산 쿠데타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폐위됐고, 전쟁영웅으로 칭송받던 참전용사들은 동맹군(공산군)과 싸운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6.25 참전으로 받은 훈장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1991년 공산 정권 붕괴로 양국 외교 관계가 복원돼 2000년대부터 한국국제협력단(KOICA), ‘따뜻한 하루’ 등 비정부기구(NGO), 기업이 에티오피아에 의료시설·학교·복지회관 등을 짓고 참전용사와 후손을 돕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1951년 그때만 해도 왕정 시대였던 에티오피아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결정에 따라 황실 근위대이자 최정예 부대 '칵뉴'를 한국으로 파병했습니다 칵뉴 대원들을 태운 배가 에티오피아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기까지 3주가 걸렸습니다
에티오피아는 육이오 전쟁에 총 6037명을 파병해 122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습니다
강원도 춘천·철원 등 중·동부 전선에서 총 253차례의 전투를 치렀는데, 단 1명의 전쟁포로도 없이 모두 승리했습니다 휴전 이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 90세가 된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은 "죽기 전에 한국에 가 하얀 눈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며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23일자로 에티오피아와 공식 수교를 체결하고, 양국 간 대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 춘천에 에티오피아 칵뉴 대대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참전기념탑을 세웠습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1968년 5월 18일 참전기념탑의 준공식에 맞춰 방한했으며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의 수행을 받던 셀라시에 황제는 춘천 공지천변을 둘러보던 중 "이곳에 에티오피아 문화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에티오피아산 원두커피를 파는 '이디오피아 벳(집)'이 문을 열어 40년 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디오피아 벳은 셀라시에 황제가 원했던 상호였습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상호를 지어주면서 박 전 대통령에게 한국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1974년 셀라시에 황제가 폐위돼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됐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지휘하는 군부세력에 의해 왕정이 붕괴하고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습니다 한편, 이디오피아 벳은 한국식 국가명 표기법인 에티오피아를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소 역시 춘천시 이디오피아길 7입니다
이디오피아 벳의 주인인 조수경씨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에티오피아라고 하면 '왜 나라 이름을 멋대로 바꾸느냐'며 화를 낸다"고 합니다 이디오피아 벳 뒤편에는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2004년 춘천시와 아디스아바바시가 자매결연을 맺어 문화교류를 이어오던 중 춘천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건립했습니다 참전기념관의 독특한 외형은 에티오피아의 전통가옥 양식을 따온 것입니다
1991년 이후 참전에 대한 보은성 지원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외곽에 있는 일명 '코리아 빌리지'는 빈민촌 중에서도 손꼽히는 빈민촌입니다 이곳에는 6·25 참전용사들이 모여 산다고 합니다
1974년 에티오피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군에 맞서 싸웠다는 이유로 참전용사들은 숙청당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났고, 연금도 끊겨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처음 코리아 빌리지를 형성할 때는 2000여 명의 참전용사들이 정착했으나 지금은 150여 명만이 남아있습니다 사회주의 정권 17년간 우리나라와 관계도 소원했습니다
사회주의 정권의 지도자였던 멩기스투가 물러난 뒤에야 우리나라는 에티오피아에 6·25 참전에 대한 보은으로 각종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1991년부터 2014년까지 공적개발원조(ODA) 명목으로 총 8861만 달러를 지원해 식수 개발, 초등학교 건립, 의료·보건 사업 등을 추진했습니다 이밖에 춘천시가 국비와 모금으로 6·25 참전용사회관을 건립하거나 기업 차원에서 복지회관을 준공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에티오피아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난 2011년 7월 8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에티오피아를 순방했으며 우리나라 정상 중 에티오피아를 국빈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멜레스 제나위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에티오피아의 참전에 대해 사의를 표하고, 5개년 경제개발 계획 등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전략을 공유할 것을 합의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멜레스 총리는 이 전 대통령에게 따로 부탁을 하나 했습니다
에티오피아 현지 대학생들에게 "이 전 대통령이 살아온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젊은이들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아디스아바바 대학 연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길게 들려줬습니다
또한, 마을 시설 건축 등 봉사활동과 의료봉사단원들 격려, 6·25 참전기념비 헌화, 참전용사들과 간담회 등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48년 만에 아버지 사진 건네받은 박근혜
이 전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도 에티오피아를 국빈 방문해 하이을러마리얌 더살런 총리와 정상회담했습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 인근에 100만㎡ 규모의 한국 섬유 단지를 조성하는 산업단지 협력 양해각서(MOU)와 7억달러 규모의 도로·건설·인프라 사업에 한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교통 협력 MOU 등을 체결했습니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에티오피아의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하이을러마리얌 총리는 "한반도 불안정을 초래하는 북한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에티오피아는 한국과 같은 편"이라고 밝혔습니다 사회주의 정권 시절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에티오피아로부터 북핵 문제 공조에 의견을 같이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은 의의가 있었습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이 6·25 참전용사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48년 전 선친(先親) 박정희 전 대통령과 셀라시에 황제가 함께 찍은 사진 액자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멜레세 테세마 참전용사회장은 선물을 건네면서 "박 전 대통령의 아버지께서 경제부흥을 위해 노력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며 인사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중심에서 한국 자동차 파는 마라톤 영웅
2008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마의 2시간 4분대의 벽을 깨뜨려 전설적인 마라토너가 된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씨가 아디스아바바 시내 8층짜리 신축 건물에서 현대자동차를 팔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 현대차 대리점 계약을 따낸 이래로 8년째입니다
게브르셀라시에씨는 에티오피아에서 마라톤 영웅으로, 한때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될 정도로 신뢰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현대차를 파는 이유에 대해 "한국 가전제품과 자동차를 보며 사람들이 놀랍다고 말한다"면서 "현대차와 한국처럼 열심히 일하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걸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새마을운동 배우지만… 한국에선 여행위험국
우리나라와 아프리카 간 총 무역 규모는 지난 2014년 기준으로 약 180억 달러입니다
이 가운데 에티오피아의 무역 규모는 2억 993만 달러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에티오피아에 주로 석유·화학제품, 건설중장비, 자동차, 의약품 등을 수출하고, 에티오피아로부터 커피, 참깨 등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우리나라가 개발협력을 구상하는 거점이자 아프리카 내 우리나라 정부의 무상원조 1위 국가입니다 우선, 에티오피아 정부는 한국식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고위급 '새마을연수단'을 꾸려 우리나라에 파견하는 것도 새마을운동을 가까이서 배우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수출 주도형 경제 구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에티오피아는 여행경보 1단계인 '여행유의' 또는 3단계인 '철수권고' 국가입니다
에티오피아에는 종교 문제와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으로 항시 테러 위험이 있어서라고 합니다
적대국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의 접경지인 아파르, 소말리 지역이 철수권고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자 국제연맹에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국토를 점령당하고 셀라시에는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1941년 그가 수단에서 조직한 에티오피아 망명군과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을 몰아냈습니다 1951년 7월 한국 땅을 밟은 강뉴부대는 미군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그해 9월 강원도 화천 적근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이듬해 10월 '철의 삼각지' 공방전에서 단 한 차례도 고지를 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1953년 7월 종전 때까지 연인원 3천518명(1956년까지 주둔 기간을 포함하면 6천37명)이 참전해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으나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부대원 모두 황제의 특명을 지킨 것입니다 전우의 시신도 모두 수습해 돌아가 부산 유엔군 묘역에는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포성(砲聲)이 멈춘 뒤에도 강뉴부대는 1956년까지 우리나라에 주둔하며 평화를 지키고 전후 복구를 도왔습니다 부대원들은 월급을 모아 1953년 경기도 동두천에 '보화원'이란 이름의 고아원(보육원)을 세운 뒤 전쟁고아들을 보살폈습니다 '보화'(Bowha)는 암하라어로 '하느님의 은혜'란 뜻이라고 합니다
에티오피아 전사들의 활약상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그리스인 종군기자 키몬 스코르딜스 입니다
그는 1954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출간한 강뉴부대 참전기 에서 "한국전 최전선에서 에티오피아군이 싸우는 모습을 목격하고 엄숙한 사명감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한 이들의 공헌도를 증언하고자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책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에티오피아 사무소장 송인엽 씨에 의해 2010년 우리말로 옮겨 발간됐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가운데는 1960년 이탈리아 로마와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 사상 최초로 마라톤 2연패의 위업을 이룬 비킬라 아베베도 있었습니다 2진으로 한국에 들어온 그는 당시 나이가 19살이어서 최전선에는 투입되지 않고 부대장 호위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자신도 한국전 참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전용사들의 운명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한국은 2000년대부터 에티오피아에 본격적으로 보은의 손길을 펼쳤습니다 코이카, 지방자치단체, 기업, 비정부기구(NGO) 등이 나서 의료시설·학교·복지회관 등을 지어주고 참전용사와 후손에게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급하는가 하면 후손들의 한국 유학과 기술교육도 돕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를 맞아 정부는 에티오피아 진출 한국 기업, NGO 등과 함께 2만8천300회분의 한국산 코로나19 진단키트 등 인도적 지원물자(약 5억8천만 원 상당)를 보낸 데 이어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명의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협회에 마스크 4만장을 전달했습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파견돼 청춘과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낸 에티오피아 젊은이들의 헌신을 기억하며 해외 참전용사 돕기 캠페인이나 감사 편지 쓰기 운동에 참여해보는 것도 6·25 70주년 기념일을 뜻깊게 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과거 무솔리니의 침략에 직면했을 때 에티오피아는 어느 나라의 도움도 받지 못했고 영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인종차별과 망국의 군주라는 이유로 온갖 천대와 설움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1936년 6월 30일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서 연설하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20세기 명연설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의 연설 마지막에 남긴 한마디는 참석자들의 양심을 후벼파는 말이자 무서운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이며 내일의 여러분일 것입니다.(It is us today. It will be you tomorrow.)" 대부분은 한 귀로 흘렸겠지만 몇 년 되지 않아 자신들이 똑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 떠올리지 않았을지.
탐욕스러운 강대국의 침략을 몸소 체험했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로서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전쟁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사실에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고 이것이 참전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문제는 당장 보낼 군대가 변변치 않았다는 점.
당시 에티오피아군은 3개 보병사단 및 지방 비정규군, 약간의 공군으로 구성되었고 단순히 머릿수만이라면 적지 않았지만 아프간의 친미군대처럼 오합지졸이었습니다.
한번 붕괴된 군대를 재건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위대를 파견키로 합니다.
병력은 1개 대대. 부대명은 '칵뉴 대대(Kagnew Battalion)'였습니다. 칵뉴는 암하라어로 '정의의 집행관(Judge)'라는 뜻이지만 황제의 아버지이자 전전대 황제의 장군으로 아두와 전투의 영웅이었던 라스 마코넨(Ras Makonnen)이 탔던 군마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황제의 아버지가 황제가 아닌 이유는 우리나 중국, 일본과 달리 에티오피아에서는 옥좌가 세습이 아니라 가장 강한 자가 투쟁으로 쟁취하는 자리라고 합니다 1951년 4월 13일 아디스아바바의 출정식에서 칵뉴대대를 사열하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의 참전이 가난뱅이 국가가 그저 미국의 떡고물이나 얻어먹자고 실업자 용병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은 칵뉴 대대가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는가만 보더라도 분명했습니다.
선발된 병사들은 황제 근위대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였으며, 사전에 한국의 여건을 조사하여 한반도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임을 알고 수도 아디스 아바바 인근의 비슷한 지형을 골라서 영국인 군사고문의 지휘 아래 무려 8개월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1951년 4월 16일 케베데 구에브레 대령이 이끄는 제1진 1,153명이 미국 수송선 '제너럴 매크리어에 올라 지부티항을 출발했고 홍해와 인도양을 지나서 20여일의 항해 끝에 5월 6일 부산에 도착하여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들은 중부전선의 미 제7사단 제32연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철의 삼각고지 전투를 비롯하여 도합 253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고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주로 급조된 징집군으로 구성되었던 미군이나 남한군과 달리 유엔군은 지원병이었고 가려뽑은 소수 정예로서 자국의 명예를 책임졌기에 잘 싸우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에티오피아군은 "과감하게 용맹했으며 적의 공격 앞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고 한번 차지한 땅을 도로 빼앗기는 일은 없었다."라면서 극찬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