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조선시대 소흑산도 출신 문순득은 홍어를 팔기 위해 2주간의 항해 후 내륙에 도착했기에 자연스럽게 홍어는 발효가 되어 삭힌 홍어를 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자연스럽게 발효된 삭힌홍어는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많은 돈을 벌며 그 일대에서 삭힌 홍어의 대부로 통하며 이름을 떨치게 된다.

1. 문순득의 일대기

다물도홍어 홍어전문판매점

다물도홍어

홍어전문 쇼핑몰 | 흑산도홍어, 국내산홍어, 칠레산홍어

hongeoshop.com

  • 1777년(정조 원년)~1847년(헌종 13) 4월 27일까지의 인물
  • 조선 후기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살면서 일대에서 홍어를 거래한 어물 장수. 본관은 남평(南平)[2], 호는 천초(天初), 대초(大初).
  • 문순득은 1777년 전라도 진도군 흑산면에 소속된 우이도(현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3]에서 아버지 문덕겸(文德謙, 1739 ~ 1796)과 어머니 창원 황 씨(昌原 黃氏) 사이의 6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 아버지 문덕겸은 문순득이 생환한 뒤 1811년(순조 11) 조정으로부터 종 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하사 받았다
  • 우이도 일대에서 홍어 장사를 하며 평범한 삶을 살던 문순득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 석 자를 남긴 이유는 그가 표류하면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여정 때문이었다. 아시아판 하멜 표류기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 1801년 12월, 24살의 청년 문순득은 작은아버지 문호겸(文好謙)과 마을 주민 4명을 따라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난다.
  • 바다에서 표류하던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 1802년 1월 류큐 왕국의 '대도(大島)'라는 곳에 표착한다.
  • 다행히 현지인들은 표류자들을 잘 보살펴주었고, 문순득 일행은 그곳에서 매일 쌀과 채소를 받고 하루 넘어 돼지고기를 제공받았으며, 병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해 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 8개월 동안 류큐에서 생활한 문순득 일행은 류큐어를 배우고, 현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낸다.
  • 그것은 바로 중국으로 가는 류큐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2년 10월, 그들은 류큐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고, 다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으나
  •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난다. 덕분에 이번에는 류큐 왕국보다 더 남쪽으로 떠내려가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이던 루손 섬에 표착한다.
  • 선단은 진공선 2척과 호송선 1척 등 세 척이었는데, 진공선 중 한 척과 호송선은 실종되어 버리고 문순득이 탄 진공선만 표착에 성공한다. 당시 루손은 조선이나 유구와는 왕래가 없는 섬이었다.
  • 따라서 루손 섬에서는 유구에서 만큼 의 대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루손 섬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배에 탔던 중국인 15명이 물을 길어 나갔다가 6명이 현지인들에게 첩자로 의심되어 잡혀 갔다.
  • 당시 필리핀 도독령은 남중국해 및 여러 곳에서 창궐한 해적들로 인해 해안가와 지방항구는 모두 닫고 마닐라 및 정해진 항구로만 무역선들을 받았는데, 해안가에 십수 명의 수상한 외국 사람들이 있으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 이후 외국인인 문순득이 필리핀 산 담배를 피우고 럼주를 마시는 일상을 보내는 사례만 봐도 필리핀 인심이 야박하다 할 수 없었다.

  • 현지인들이 말이 안 통하는 동아시아인계 외국인을 보자, 혹시나 해서 차이나타운에 데려다준 것만 봐도 이기주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알맞게 조선으로 귀환한 것을 보면 전혀 외국인에 야박했다고 하기 어렵다.
  • 한참 만에 푸젠성 출신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화교 마을에 도착했다.
  • 그제야 배에서 내린 문순득 일행은 9개월을 그곳에 머물며 마을 곳곳을 구경했다.
  • 그때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신묘(神廟, 파블로 대성당)를 방문하기도 했다.
  • 신묘는 30~40칸의 긴 집으로 비할 곳 없이 크고 아름다웠으며 이로써 신을 모시는 대중을 대접하였다.
  • 신상을 모셔 놓았다. 신묘 한쪽 꼭대기 앞에 탑을 세우고 탑 꼭대기에 금계(金鷄)를 세워 바람에 따라 머리가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 하였다. 탑 꼭대기 아래 벽의 밖으로 크기가 같지 않은 종 4~5개를 걸어 제사와 기도 등 일에 따라서 다른 종을 친다.
  • 루손에 머물던 문순득 일행은 조공선을 지휘하던 류큐 왕국 관리와 중국인 상인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일행 중 4명이 먼저 중국으로 출항하고 문순득과 김옥문은 루손 섬에 남게 된다.
  • 문순득은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일로카노어와 루손 섬의 풍속을 빠르게 익혔다. 유구국에서는 식량과 의료를 지원받으면서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던 반면 루손에서는 약간의 지원을 받긴 했지만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했는데, 문순득은 끈을 꼬아 파는 것과 쑤저우(蘇州) 상인들의 쌀 거래를 돕는 것으로 생계와 용돈(술과 담배)을 해결했다고 한다.
  •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한 것은 아니고 그곳을 돌아다니며 풍속을 보고 관광도 하고 살았다. 당시 인기 있던 투계를 구경하거나 현지 성당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 그 후 1803년 8월 루손에서 마카오 상선을 얻어 타고 중국의 마카오로 이동한다. 문순득이 광둥성의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표해시말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카오 당국이 심문한 기록에 따르면 문순득은 3월 16일에 '여송국왕'을 만났다고 한다.

흑산도 홍어
흑산도 홍어
흑산도 홍어
흑산도 홍어

  • 다만 문순득이 상세한 사정을 알지 못해 왕이라고 지칭한 것이고, 그는 실제로는 당시 필리핀 도독령의 총독이던 라파엘 마리아 데 아길라르 이 폰세 데 레온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그 '왕'은 문순득과 중국인 표류 민 일행을 심문하고 그들이 필리핀에 표류한 정황을 물은 후,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 그렇게 송환 결정이 내려지고도 두 달이 지나고 마침내 5월 1일, 그 광둥성 상선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바람의 때를 맞추기 위해 다시 3달 동안 기다린 후에 배는 1803년 8월 28일, 비간의 항구를 출발했다.
  • 그 후 육로를 통해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1804년 12월 조선의 한양에 도착하고, 마침내 집을 떠난 지 3년 2개월 만인 1805년 1월에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온다.
  • 문순득은 글을 배우지 못한 장사치였으나 총명하고 입담이 좋았다.
  • 그의 표류 이야기는 곧 주변 사람들을 통해 퍼져 나갔다. 전 세계가 중국, 일본이나, 여진족튀르크 족거란족 같은 북방 유목제국들 같은 동북아시아 국가들이나, 인도 정도라고 생각했던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문순득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 고향에 돌아와 다시 본업인 어부로 돌아간 문순득은 어느 날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는데, 이때 흑산도에 유배 온 정약전을 만나게 된다.
  • 그리고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풍랑을 만나 표류하며 보고 들은 바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문순득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쓴다
  • 문순득의 표류기는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전해졌으며, 필리핀 도독령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용함을 전해 들은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하게 된다.
  • 또한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제자인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하였고, 『운곡선설(雲谷船說)』[17]을 집필하게 한다. 알게 모르게 조선 후기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은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
  •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에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다. 정약용도 형 정약전을 통해 문순득의 친절을 알고 있었기에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정약전이 사망한 후 문순득이 장례를 잘 치러 준 것을 감사하는 편지도 보냈다.
  • 그 사이 1801년(순조 1년) 8월에 5명의 외국인이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북경으로 보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지만 청나라에서도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여 되돌려 보냈고, 그 사이에 1명이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러다 조선에 표착한 유구국 사람 궁평(宮平)이 이들과 대화한 끝에 루손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이에 제주관청에서 표류인들을 궁평과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곧바로 그가 고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그대로 무산되며 잊혔다.
  • 그렇게 이 표류인들은 9년이나 제주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또 1명이 죽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문순득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이들에게 데려다줬는데, 문순득이 일로카노어로 말을 걸자, 그들이 "드디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고향인 루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순조실록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 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에 이자(移咨)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 이에 앞서 신유년(1801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1802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무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 그런데 표류되어 머무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 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 그리하여 미친 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 이에 조정에서는 1835년(헌종 원년) 문순득의 공을 치하하여 가선대부 종 2품 공명첩을 하사했다고 한다.
  • 참고로 조선시대 관직체계에서 정1품부터 정 3품까지는 당상관이라고 해서 고위직으로 분류되었다.
  • 즉, 비록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고위직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얻었다.
  • 그야말로 인생살이 새옹지마. 이후로도 천수를 누리다가 1847년 4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 여러 일화를 볼 때 문순득은 비범한 기억력과 외국어 습득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 특히 문자를 익힐 기회가 적고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조선 시대의 평민이 그랬다는 것이 더 놀라운 점이다.
  • 박연의 사례나 하멜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지만, 보통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뚝 떨어진 외국인들은 그 나라의 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며, 이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상술한 일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제주도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은 장장 9년 동안 자신들의 국적도 해명 못하는 상태였지만 문순득은 고작 3년 만에 류큐어와 일로카노어를 능숙하게 배워서 귀국하였다.
  • 귀국 이후에도 일로카노어 통역을 할 정도로 숙달된 실력이었다는 걸 보면 가히 외국어 마스터 달인으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 또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표류국에서 언어와 생계수단을 빠르게 배워 적응하며 살았던 것을 보면, 굉장히 강한 생활력을 가지고 매우 강한 강철 멘털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 그리고 연고도 없는 외지에서 생판 모르는 외국인에게 말을 걸고 언어를 배웠을 테니 대단히 외향적이고 친화적이며 붙임성이 좋았을 법한 성격도 짐작할 수 있다.
  • 문순득은 19세기 초에 필리핀과 마카오를 최초로 여행한 조선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표류는 개인적으로는 불운이었지만,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필리핀과 서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특히, 정약용과 정약전, 이강회 등 실학자들의 세계관 확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2. 홍어

흑산도여행사 감동투어

감동투어 | 홍도/흑산도/가거도 섬여행 전문 여행사

gohongdo.com

  • 회유성 어종으로, 서해 넓은 바다가 제 집인 양 헤엄치고 다닙니다. 대청도 어선이 잡으면 대청도 홍어가 되고, 흑산도 어선이 잡으면 흑산도 홍어가 됩니다. 흑산도 쪽에선 홍어가 산란기를 앞두고 흑산도 쪽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흑산도 홍어가 더 맛있다고 합니다.
  • 흑산도 홍어의 유명성: 산란지: 흑산도는 홍어의 산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어는 산란기를 앞두고 흑산도 쪽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흑산도 홍어가 더 맛있다고 평가됩니다.
  • 맛과 품질: 흑산도 홍어는 풍부한 어종과 해양 생태계로 인해 특별한 맛과 품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흑산도 홍어를 찾게 됩니다.
  • 흑산도에서 홍어가 많이 잡히는 이유: 해류와 수온: 흑산도 주변 해역은 해류가 강하고, 수온이 적당한 환경입니다. 이러한 조건은 홍어가 번식하고 번식지로 이동하기에 이상적입니다.
  • 자연 서식지: 흑산도 주변 해역은 홍어가 서식하기 좋은 자연환경을 제공합니다. 바닷속의 암초, 바위, 해조류 등이 홍어의 서식지로 적합합니다.
  • 홍어는 주로 북태평양의 차가운 해역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은 동해와 서해, 북서태평양 바다 쪽에서도 서식합니다. 특히 해저 협곡이나 해양, 바다바닥 등에서 발견되며, 이러한 서식지는 홍어가 먹이와 서식 환경을 확보하는 데 좋습니다. 또한 홍어는 떼를 지어 다니며 다른 어류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청도는 물론, 오래전부터 홍어를 즐겨온 인천 지역에서도 홍어를 잡아먹거나 말려 탕으로 끓여 먹었습니다. 인천의 홍어 어획량은 대청도의 홍어 어획량과 비슷합니다.
  • 현재 대청도에는 홍어 전문 어선 8척이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홍어를 잡을 수 있습니다.

으뜸여행사 홍도 흑산도 전문여행사

으뜸여행사

best82tour.kr

3. 흑산도 홍어와 다른 지역의 홍어 맛 차이점은?

산란지와 수온:

  • 흑산도 홍어는 흑산도 주변 해역에서 산란하고 자랍니다. 이 지역은 홍어가 번식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합니다.
  • 다른 지역의 홍어는 해당 지역의 해역에서 산란하며, 수온과 해류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먹이와 서식 환경:

  • 흑산도 홍어는 풍부한 어종과 해양 생태계로 인해 특별한 맛과 품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 다른 지역의 홍어도 해당 지역의 먹이와 서식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문화적 요소:

  • 흑산도 홍어는 흑산도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요소는 홍어의 맛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다른 지역의 홍어는 해당 지역의 문화와 관련된 특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4. 흑산도에서 홍어를 잡는 방법

주로 주낙이라는 전통적인 어로 방식을 사용합니다.

주낙 (Joonak):

  • 주낙은 미끼를 사용하지 않고 여러 개의 낚시를 단 낚싯줄을 물속에 늘어뜨리는 방법입니다.
  • 홍어가 자주 지나가는 길목에 주낙을 설치하고, 홍어가 낚싯줄에 걸리게 합니다.
  • 이 방식은 흑산도 주변 해역에서 홍어를 한 마리씩 어획하는 방법으로, 홍어의 특별한 맛과 품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 흑산도 홍어는 이러한 전통적인 어로 방식으로 잡히며, 이 방법은 제11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코레일투어 흑산도 전문여행사

여행의 모든 것 코레일투어(주)

가족여행, 부모님효도여행, 바다열차, 정선옥산장, 1박2일, 당일기차여행 전문

www.korailtour.com

5. 홍어를 먹는 방법은?

홍어를 먹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준비하고 즐깁니다:

홍어회 (Raw Hongeo):

  • 홍어를 신선한 상태로 회로 먹는 방법입니다.
  • 얇게 썰어서 간장과 고춧가루, 마늘 등과 함께 즐깁니다.

6. 흑산도 추천 관광지

흑산도는 대한민국의 최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특별한 맛의 홍어로 유명합니다. 흑산도를 방문하시면 다음과 같은 관광지를 추천드립니다

  • 흑산도 일주도로: 흑산도를 한 바퀴 돌면서 섬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버스 투어입니다.
  • 흑산항 여객터미널: 흑산도를 방문하실 때 출발점이 되는 곳입니다.
  • 하죽도: 흑산도 주변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습니다.
  • 흑산도는 대한민국의 최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특별한 맛의 홍어로 유명합니다. 이곳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역사서가 되어주며,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7. 흑산도의 역사

  •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곳은 그동안 많은 전쟁과 충돌의 현장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만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 흑산도는 828년에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교역할 때부터 사람이 정착하였으며, 월산군에 속하였습니다. 이후 흑산진이 설치되고, 나주목에 소속되었다가 1888년에 흑산진으로 승격하여 만호를 두고 서해진을 감시하였습니다. 또한, 1969년에 신안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 흑산도는 그 자체로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섬사람들의 생활 문화를 살펴보면 그들의 강인함과 끈기,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흑산도여행을 추천드리며 특산물인 홍어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