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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영국은 종교가 많은 것을 지배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계시로 모든 것이 이뤄졌다는 사고로 가득 차 있었던 시기에 진화론을 들고 나온,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펴냄으로서, 지대한 논란을 일으켰던 다윈, 약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화론의 바이블로 종의 기원을 얘기합니다. 이 종의 기원에 관한 책 한 권을 소개(번역서)하고자 합니다.

 

 

종의 기원(찰스 다윈 ; 다윈포럼 기획 저자(글)  장대익 번역,  최재천 감수)

 

 

이 책은 번역서입니다. 글 내용을 읽는데,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예를 들어 어떤 것을 말하려는지는 한참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무협지가 아닌지라 속도도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뿐 아니라 여러 종들의 진화과정에 대한 정의를 각 사례와 예시를 일일이 들어가며, 여러 고증을 통해, 직접 연구한 자료들로 가득합니다.

 

주인공인 촬스 다윈이 비이글호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면서 파타고니아에서 채집한 여러 종들을 영국으로 돌아와 연구하며, 마침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진화론의 선구자가 됩니다.

 

대략의 내용을 봅니다.

 

1. 가축과 작물의 변이

 

 다윈은 사육과 재배 하의 많은 종들이 선택적 교배를 통해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화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다윈은 변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 번째는 기형같이 급작스러운 변이이고, 두 번째는 항상 존재하는 작은 변이들입니다.

 

둘 다 유전되지만 다윈은 두 번째 변이가 진화에 있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생식기관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자연상태에 동물을 서식범위를 제한해 두면 본능을 막는 것이기 때문에 번식을 못하고 교잡하는 상황에서는 더욱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토끼나 족제비는 비자연적 공간에 상태에서도 잘 번식한다고 했습니다.

 

2장, 특징이 뚜렷한 변종은 종(incipient species)이 되며 종은 단지 특징이 확연한 변종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다윈은 변이는 자연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박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자연 상태에서의 변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종들의 원형을 신에 의해 정해져 있기에 변이의 중요성을 간과했습니다. 반면 다윈과 월리스는 변이를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으로 생각했습니다.

 

3장, 변종이 종으로 변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자연선택의 개념을 소개합니다.

 

“이 생존을 위한 경쟁에 의해 변이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또 어떤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라도, 어떤 종이든 그 한 개체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다른 생물 및 생존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무한하게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 개체를 보존하도록 작용할 것이고, 그것은 또 일반적으로 자손에게 전해져 내려갈 것입니다.

 

그 자손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존의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종이든 주기적으로 다수의 자손이 태어나지만, 그 가운데 소수만이 존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경미한 변이라도 유용한 점이 있으면 보존되는 이 원리를, 인간의 선택능력과 구별하기 위해 나는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로 했다.”라고 합니다.


다윈은 사자의 갈기나 새들의 노래와 같이 암컷과 수컷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는 형질들을 설명하기 위해 주로 수컷들의 짝짓기 경쟁에 의해 발생하는 성 선택(sexual selection)의 개념을 도입합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제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변이와 유전

 

다윈의 시대는 유전의 법칙과 원리가 아직 밝혀지기 전이었습니다. 1865년 그레고어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표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윈은 변이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비슷한 방식의 유전학(일부 획득 형질 유전)에 관한 생각을 주장하고 있으며, 다윈은 이를 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다윈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직접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다윈은 유전되는 변이가 발생하는 원인을 몰랐지만 환경적 조건에서 변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윈은 변이가 생기는 원인이나 이를 지배하는 법칙을 알지는 못했지만 선택에 의해 이러한 변이들이 세대가 지남에 따라 큰 차이로 변해갈 수 있음을 인식하였습니다.)

 

유전 현상을 설명하는 모델은 1930~1940년이 되어서야 변이를 설명하는 모델과 합쳐졌습니다.

6,7,8장은 자연 선택 이론에 대한 반박들과 그에 대한 답변들을 제시합니다. 자연선택에 대한 반박의 첫 번째는 서로 가까운 종들 사이의 중간 형태를 띠는 생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윈은 경쟁에 의해 중간 형태가 멸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6장의 나머지 부분은 자연선택이 어떻게 복잡하고 특화된 기관들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화된 기관들은 완전하게 발달되기 전의 중간 형태는 기능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컨대 박쥐와 똑 같은 구조와 습성을 가진 동물이 이와는 전혀 다른 습성과 구조를 가진 다른 어떤 동물의 변화에 의해 발생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자연선택은 한편으로는 파리를 쫓는 데 사용되는 기린의 꼬리와 같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관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과 같은 비할 데 없이 완전하고 경탄할 만한 구조를 가진 기관을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다윈의 답은 중간 형태의 기관들 또한 기능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윈은 하늘다람쥐와 가죽날개원숭이를 통해 박쥐가 날지 않는 조상들로부터 어떻게 진화해 나올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또한 다윈은 무척추동물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시신경으로 구성된 눈을 통해 척추동물의 눈이 진화해 나온 과정을 설명합니다. 다윈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만일 다수의 연속적인 경미한 변화에 의해서는 생겨날 수 없는 어떤 복잡한 기관이 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나의 학설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예를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7장, 본능의 진화를 다룹니다.

 

 

다윈은 노예를 만드는 개미와 육각형의 벌집을 짓는 꿀벌들의 예를 듭니다. 다윈은 어떤 개미 종은 다른 종들보다 노예들에 더 의존한다는 사실을 관찰하였고 많은 종들이 다른 종의 번데기들을 식량 삼아 저장한다는 사실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는 노예들에 극적인 의존성을 보이는 종이 점차적으로 진화해 나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벌들의 경우 다윈은 벌들이 밀랍을 경제적으로 이용해야만 하는 자연선택적 압력으로 인해 육각형으로 벌집을 짓는 본능이 발달하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다윈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마지막으로 논리적인 추론은 아닐지 모르지만, 내가 상상하기로는 뻐꾸기 새끼가 배다른 형제를 둥지에서 밀어내는 것도, 개미가 노예를 만드는 것도, 맵시벌과의 유충이 살아 있는 모충의 체내에서 그 몸을 파먹는 것도, 모두 개별적으로 부여되거나 창조된 본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을 증식시키고 변이 시키거나, 강자는 살리고 약자는 도태하여 진보로 이끄는 일반적인 법칙의 작은 결과로 간주하는 편이 훨씬 만족을 안겨준다.”

 

8장, 잡종이 번식을 못 하게끔 하는 종의 특별한 성질을 다룹니다.

 

 다윈은 잡종의 형성 여부와 잡종의 번식 가능 여부는 종에 따라 다양하며, 특히 식물에서 더 다양하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완전 다른 종으로 생각되었던 두 종이 번식 가능한 잡종을 만들 때도 있는 반면 같은 종의 두 변종이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다윈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초의 교잡과 잡종의 불임성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왜 동식물이 자연 상태에서 옮겨지면 불임이 되는가 하는 경우처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이 장에 열거한 여러 가지 사실들은 종이란 원래 변종으로서 존재했다고 하는 소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는 나에겐 생각되지 않는다.”

 

9장, 지질학적 기록들이 점진적으로 변화해 가는 화석이 아닌 갑자기 나타나는 형태의 화석들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다윈은 라이엘의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로부터 화석화는 매우 드문 과정이기에 지질학적 기록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가져옵니다. 다윈은 비록 진화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발견들이 지속됨에 따라 중간 형태의 화석들이 발견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다윈은 생물들이 점진적으로 진화할 만큼의 시간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질학의 원리》와 다른 퇴적층에 관한 자료들을 인용했습니다.

 

다윈은 캄브리아기 이전의 생물들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문제에 맞닥뜨렸지만, 이후 선캄브리아기 생물의 화석들이 발견되었습니다.

 

10장, 화석 기록들이 자연선택과 개별적 창조 이론 중 어느 것에 의해 더 잘 설명되는지를 평가합니다.

 

다윈은 종들은 천천히 변하지만 모두 같은 속도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를 토대로 다윈이 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 hypothesis)을 예측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윈의 점진진화론(gradualism)에 더 무게를 둡니다.

 

다윈은 리처드 오웬(Richard Owen)의 기록을 인용하여 초기의 생물들은 단순하며 오늘날의 생물들의 형태의 중간 형태를 띠는 것이 많은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다양해지고 특화된 형태들이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비슷한 종들이 공존하다가 멸종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는 멸종의 패턴 또한 다윈의 이론에 의해 설명됩니다. 근래에 멸종된 종들은 더 일찍 멸종한 종들에 비해 현존하는 종들에 더 가깝습니다.

 

 

11장은 생물지리학적 증거를 다룹니다.

 

 먼저 서로 지역에 따른 동물 및 식물군의 차이가 단순히 환경적 차이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호주는 같은 위도 상에서 비슷한 기후를 띠지만, 이들 지역의 동식물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 대륙의 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종들은 다른 대륙보다 그 대륙의 다른 지역들의 종들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윈은 이주에 있어서의 장애물이 다른 지역들의 종들로 하여금 차이를 띠게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태평양 쪽의 중앙아메리카와 대서양 쪽의 중앙아메리카는 파나마 지협에 의해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공통된 종이 거의 없습니다. 다윈은 이를 이주와 변이를 수반한 유전(descent with modification)의 결합을 통해 설명합니다.

 

다윈은 한 대륙으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진 화산섬에 그 대륙의 생물종이 건너간 이후의 일을 설명합니다. 건너간 생물종들은 시간에 따라 변이 되지만, 여전히 대륙의 생물종들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윈은 이러한 예들을 직접 관찰하였습니다.

 


12장, 생물지리학적 논거가 계속되며, 두 장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지리적 분포에 대한 매우 중요한 여러 사실은 이주와 그것에 이은 변화 및 새로운 형태의 증식이라는 이론으로 설명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우리는, 현재의 수많은 동식물의 구계를 분리하는 데뿐만 아니라 그것을 형성함에 있어서도 수륙의 장벽이 고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속과 속 및 과가 국지화한 사실과, 남아메리카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위도에서 평원과 산지의 생물, 숲과 늪과 사막의 생물이 극히 신비로운 양상으로 유연관계에 의해 결합되어 있으며, 그러한 생물이 또한 이전에 같은 대륙에서 살다가 멸종한 생물과 결합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 우리는 이러한 것과 똑같은 원칙을 바탕으로, 앞에서 내가 밝히려고 애썼던 것처럼, 대양도에는 근소한 생물밖에 없지만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이 고유한 종 또는 특유한 종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이주의 방법과 관련하여 어떤 군에서는 모든 종이 고유한 것이고, 다른 군에서는 같은 강에 속하면서 어느 종이나 인접한 지구와 공통인 것은 어째서인지 이해할 수 있다.”


13장, 먼저 형질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레벨로 구성되어 있는 종들의 분류를 다룹니다.



“분류에 있어서의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규칙과 보조수단과 곤란은 내가 크게 잘못 알고 있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견해로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적 체계’는 변화를 수반하는 유래에 기초를 둔 것이라는 사실, 박물학자에 의해 둘 또는 그 이상의 종 사이의 진정한 유연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형질은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그것이 사실인 한 진정한 분류는 모두 계통적인 것이 된다는 것, 유래의 공통성은 박물학자가 무의식적으로 탐색해 온 숨은 유대이며, 미지의 어떤 창조계획이나 일반적인 명제의 서술이 아니고, 또한 다소나마 비슷한 대상을 그저 한데 묶었다 떼었다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견해이다.”

 

다윈은 상동기관의 중요성을 포함한 형태학을 다룹니다. “물건을 쥐는 데 적합한 사람의 손, 땅을 파는 데 적합한 두더지의 앞발, 말의 다리, 돌고래의 물갈퀴, 박쥐의 날개가 모두 동일한 패턴에 따라서 구성되어 있으며, 똑같은 상대적 위치에 배치된 똑 같은 뼈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것이 또 있을까?” 다윈은 강의 동물들의 배아가 종종 굉장히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다윈은 날지 못하는 새의 날개와 같은 흔적 기관들을 논하며, 어떤 흔적 기관들은 배아 상태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마지막 장은 앞의 장들을 요약하며,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자연사학의 다양한 분야에 획기적인 변화를 줄 것을 기대하며 마무리짓습니다. 다윈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내용을 책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심리학이 새로운 기반 위에 세워질 것이며 “인류의 기원과 역사에 밝은 빛을 비춰줄 것”임을 언급합니다. ‘종의 기원’을 마무리 짓는 유명한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갖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숲 속에서는 새가 노래하고 곤충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축축한 땅속을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번잡스러운 땅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한 개개의 생물은 제각기 기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서로 매우 다르며 매우 복잡한 연쇄를 통해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그런 생물이 모두 지금 우리 주위에서 수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한 법칙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말한다면, ‘생식’을 수반하는 ‘성장’, 거의 생식 속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는 ‘유전’, 생활의 외적 조건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작용에 의한, 또 용불용에 의한 ‘변이성’, 생존경쟁과 나아가서는 ‘자연선택’을 초래하고, 마침내 ‘형질의 분기’와 열등한 생물을 ‘멸종’시키는 높은 ‘증가율’ 등이다. 그리하여 직접적으로 자연계의 싸움에서, 또 기아와 죽음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사항, 즉 고등동물의 산출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넣어 졌다고 보는 견해, 그리고 이 행성이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하는 동안 이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경탄스러운 무한의 형태가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는 이 견해에서는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2. 촬스 다윈의 생애

 

촬스다윈은 본인의 노력과 열정도 있어서 진화론의 새장을 열었지만, 요즘으로 얘기하면, 금수저의 집안으로 태어나서, 평생, 직장이나 사업 없이 부유한 부모의 도움으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행운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생활고에 지치거나, 돈에 쪼들려 연구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한평생 없었습니다. 더욱이 영국으로 돌아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매진에 매진을 거듭해 돈방석에 앉기도 했으니, 남모르는 어려움은 있을지는 몰라도 평생 매우 풍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잉글랜드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의사인 로버트 워링 다윈의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은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의 의술을 행했던 것은 아니었고, 주로 약물과 심리치료를 통한 몸의 안정을 통해 병증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는 의사로서의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었는데, 그 능력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당시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이래즈머스 다윈에게 주치의가 되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래즈머스 다윈은 토리당을 매우 싫어했는데, 당연히 국왕의 주치의가 되면 그들과 엮이고 한패가 되는 것이라 여겨 거절했다고 합니다.

 

거의 반드시 귀족의 작위를 수여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손자인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더불어 종교적으로 사람의 신분을 가르는 짓은 어리석다면서 기독교 주류를 비난하다가 파문당했으나 당 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까지 이름을 남긴 저명한 학자들과도 교류할 정도로 존경과 인정을 많이 받았던 터라 별다른 불편을 겪지 않았고 그걸 자랑하며 당당하게 지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주장들은 당대에 묻혔고, 손자의 엄청난 유명세 때문에 오히려 불이익을 받기도 했지만, 이러한 사상이 집안의 밑거름이 되어 손자 찰스 다윈이 그런 이론을 펼칠 수 있었던 만큼 지금은 상당히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래즈머스 다윈은 자신의 아들들도 의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찰스 다윈의 아버지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런 아버지의 바람대로 훌륭한 의사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성공보다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래즈머스와 달리 로버트는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슈루즈베리는 잉글랜드 슈롭셔 주의 주도인데, 당시 찰스 다윈의 아버지는 슈루즈베리의 3/4을 소유한 대지주였습니다.

 

그는 대부업이나 부동산업 등을 통해 재산을 크게 키웠으며, 그의 집인 '더 마운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의학적인 상담을 받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금전적인 거래나 기타 상담을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로버트 다윈은 고집이 있지만 온화한 아버지상의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아이들이 움직여주기를 바랐지만, 강요하거나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는 저녁이면 찰스 다윈과 함께 마차를 타고 산책하며 세상의 여러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끊기면 찰스 다윈은 자신이 관찰한 새의 이야기들로 남은 부분을 채웠습니다.

찰스 다윈의 어머니인, 수재나 다윈도 상당한 상류층 가문 출신으로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두 가문은 학문적, 사상적, 경제적 교류가 많았다고 전해집이다.

 

그러나 찰스 다윈과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매우 깊은 관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다윈의 육아를 맡은 것은 그의 누나들, 형이었고 그가 부모님과 만나는 시간은 기껏해야 저녁 후 1시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다윈이 어머니와 사별한 것은 7살 때였기 때문에 그가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습니다. 실제로 다윈은 후에 그의 어머니에 대해 가진 기억이 거의 없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가 죽던 날 자신과 누나가 매우 크게 울고 있었고, 하루 종일 그랬었다고.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후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로버트 워링 다윈은 슈루즈베리의 한구석에 '더 마운틴'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뒤편에는 작은 개천이 둘러 흐르고, 집을 조금만 벗어나면 숲이 있었습니다.

 

찰스 다윈은 이 개천과 숲에서 여러 생물을 관찰하거나 채집하였습니다.

 

그의 집에는 작은 다용도실도 있었는데, 찰스의 형인 이래즈머스와 함께 화학 실험을 하며 박물학에 기초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용도실의 반대편에는 작은 온실이 딸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취미였는데, 다양한 식물을 기르고 상세히 기록하는 것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들 찰스 다윈도 아버지의 취미를 따라 했으며 지금까지 전해지는 다윈의 노트에도 어린 시절 당시의 날씨나 식물의 길이, 모양 등을 기록한 내용들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윈의 이러한 취미들은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 이어졌으며, 훗날 '종의 기원'을 출간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생물학 분야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며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찰스 다윈은 1817년부터 1825년까지 초중등 교육을 받았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다윈이 다녔던 곳은 슈루즈베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슈루즈베리 학교'였습니다.

 

하지만 다윈은 학생들의 재능과 개성을 살리지 못하는 암기 위주의 권위적인 교육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자연히 공부에도 영 소질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성적은 낮을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라틴어나 고전 공부와 같은 당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했던 과목들을 굉장히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교사에게서 심한 욕을 듣기도 했고, 이 사실을 부친 로버트 워링 다윈에게 직접 통보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집안에선 그런 다윈을 꾸짖지 않고 집에서 자유로운 복습과 예습을 권장하였습니다.

 

찰스 다윈이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서길 부끄러워하고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논쟁에 나서면 무척 당황해한 버릇은 어릴 적의 교육 여파가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아버지나 아우와 달리 매우 당찬 성격인 형 이래즈머스 다윈은 그런 걸로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위로하며 그를 아껴주었습니다.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 학교에 찰스를 계속 남겨두는 것이 그다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고, 이래즈머스와 함께 의학 공부를 하라고 찰스를 에든버러로 보냈습니다.

 

1825년, 찰스 다윈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에든버러 대학교 의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에든버러 대학교는 해부학계에서는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으며 찰스 다윈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으므로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다윈은 여기서 1827년까지만 공부하다가 자퇴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대학교는 지금의 인강 사이트와 비슷하게 운영되었는데, 학생들은 강의를 듣기 위해 대학에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강사에게 직접 지불했고, 강사는 그 돈으로 생활비 등을 충당했습니다.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 소위 '돈이 되는 강의'를 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쟁에서 자유로운 강사들이 있었는데 그 강사의 과목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된 경우였습니다. 이럴 경우 기본적인 학생수가 보장되므로 어떤 강의를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고, 대충대충 강의하는 교수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대충대충 강의하는 교수들 중에는,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강의하던 강의록을 그대로 읽는 교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수업이기 때문에 따라가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다윈은 이내 지쳐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들었던 해부학 수업이었습니다. 해부학으로 유명한 에든버러 대학교답게 해부학 수업은 강사가 실제 사람의 시체를 가지고 해부를 하면서 진행되었는데, 다윈의 강의를 담당하던 교수가 능력이 부족하여 좋은 시체를 구해오지 못했습니다. 이는 당시 스코틀랜드 법률이 바뀌면서 해부용 시신을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컸습니다. 당시 해부학자들은 남몰래 묘지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을 파오는 도굴꾼들과 거래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는데, 망자에 대한 존중의식이 점점 신장하면서 도굴꾼들이 활동하기 어려워진 것이 큰 요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윈이 수강하던 시기, 해부학 수업에 사용된 시체는 온전한 시체라기보단 방부제에 절여진 덩어리에 불과했고, 공부할 만한 부분들이 이미 상당히 훼손되어 제대로 된 강의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학생들이 직접 실습할 시신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잘 보이지도 않는 시신을 멀찍이서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그 시체를 보면서 다윈은 수술을 하는 것에 혐오감을 가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교수의 강의력까지 좋지 않아 찰스 다윈은 이 수업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마취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수술을 하며 엄청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어서 저런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에 큰 회의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공부하는 환경에도 적응하기 힘들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의사가 되어 해부나 수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윈은 정말로 의사가 되기 싫어했습니다.

 

다윈은 점차 자신이 굳이 의사가 되어 생계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의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1827년 에든버러 대학교를 자퇴하게 됩니다. 그는 의사가 되는 길보다는 성공회 신부가 되는 길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이러한 아들의 생각을 받아들여 찰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컬리지 신학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학교를 자퇴하기 전, 찰스 다윈은 로버트 그랜트와 함께 플리니안 학회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학회는 에든버러에 다니는 학생들이 모여서 서로 연구한 것을 발표하고 함께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로버트 그랜트는 찰스 다윈의 동료와 같은 존재였는데, 찰스에 비해 아는 것이 많고 연구 방법 등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젊은 과학자로 명성을 쌓고 있어 이내 찰스는 로버트 그랜트의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둘은 함께 해양의 무척추동물을 연구하였는데 찰스는 이때 현미경을 다루는 법 등의 기본적인 생물학 연구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연구를 통해 아는 이때부터 관련 지식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또한, 이때 이미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도서 대출 목록이나,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진화론적인 사상을 가졌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나 라마르크의 저서들을 읽어보았음은 명확합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많았기에 다윈이 그 영향을 받았음은 틀림없다고 보입니다. 그와 자주 붙어 다녔던 로버트 그랜트 역시 라마르크주의자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즉 다윈이 대학생인 시절에도 '진화'라는 개념은 낯선 개념이 아닌 학계 최신의 떠오르는 연구분야였으며 많은 '가설'들이 나오던 시점이었습니다.

에든버러 대학교를 자퇴한 후 다윈은 182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컬리지에 입학하여 1831년에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다윈 본인은 에든버러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배워야 하는 과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의 사목보다는 박물학에 관심이 많아서, 친척 형인 폭스와 함께 곤충을 잡으러 다니거나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식물학 강의를 꼬박꼬박 챙겨 들었습니다.

 

다윈의 열정과 지적 능력 그리고 다윈의 가문은 찰스 다윈이 헨슬로의 총애를 받게 하는 데에 충분했기 때문에 이내 찰스는 헨슬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헨슬로는 다윈이 광물학과 지질학을 배우면 훌륭한 박물학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같은 대학의 애덤 세지윅 교수에게 그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지질학은 잘 모르는 자신보다는 애덤 세지윅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찰스는 케임브리지에서 사촌형 폭스, 교수인 헨슬로와 세지윅에게 곤충학, 식물학, 광물학, 지질학과 같은, 박물학의 여러 지식들을 흡수하게 됩니다.

이런 인연은, 현대 생물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찰스 다윈이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해인 1831년 12월 27일 영국 해군의 탐험선 HMS 비글 함을 타고 약 5년(1836년 2월 10일까지) 동안 탐사 여행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그는 생물학자로서 승선한 게 아니라, 지질학 탐사와 과학 표본 수집을 원하는 로버트 피츠로이(1805~1865) 함장의 지적 욕심에 따라 승선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승선이 결국 세계사에 빛나는 종의 기원을 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세계 각지에 여러 탐험선들을 파견해서 측량과 과학 연구를 시키고 있었는데, 피츠로이 함장의 비글 함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비글 함은 과거에 연구 목적으로 출항하였다가 긴 항해 속 외로움으로 전임 함장이 자살하고 말았고, 새로 그 배의 함장이 된 피츠로이는 선배의 전철을 피하고자 젊은 의사나 과학자를 태워 교류하기를 원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헨슬로에게 그런 사람을 찾는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헨슬로는 곧바로 찰스 다윈을 추천하여, 22살의 찰스 다윈이 비글 함에 승선할 수 있게 됩니다. 정말 운명적 승선입니다.

다윈의 그 자리는 무보수였지만 항해 끝에 수집해 온 진귀한 물건을 팔면 돈은 좀 될 거라 꼬셨는데, 장거리 항해가 굉장히 위험한 모험이었으므로 제정신인 영국의 의사, 박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다윈은 젊은 나이의 패기 때문인지 이 자리를 멋도 모르고 학구적인 욕심으로 타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출항 → 브라질 사우바도르 항 → 리우데자네이루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포틀랜드 섬 →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서 → 칠레 발파라이소 →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제도 → 태평양 횡단 → 뉴질랜드 →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 대서양의 어센션 섬 → 다시 브라질 사우바도르 항 → 영국 콘월의 팰머스 항 도착.

당시의 항해 기술로는 이 정도 항해를 하면 살아 돌아올 확률이 반 정도였다고 합니다. 5년간의 탐험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다윈은 이미 엄청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탐험하며 기록한 것들을 전보를 통해 영국에 지속적으로 보내왔기 때문인데, 지질학, 광물학, 생물학에 걸친 자세하고 다양한 새로운 지식에 사람들은 어느새 다윈이 보내오는 다음 전보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다윈은 세계 일주 탐험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결과 보고서 작성에 노력하였다. 1837년 다윈은 이른바 "적색 메모장" (Red Notebook)에 최초로 종의 변화에 관한 착상을 기록하였습니다.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었으며,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에마 웨지우드(1808~1896)와 결혼한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웨지우드 도자기 회사를 운영하는 에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구조와 분포〉를 발표했으며, 같은 해에 종의 발생에 관해 착상했습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 함의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습니다.

 

귀국 직후 종의 기원을 저술하기 시작했지만 세상에 미칠 파장을 염려, 더 확실한 증거를 모으기 위해 2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이후, 훗날 다윈의 평생 친구이자 선의의 라이벌이 된 생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인도네시아에서 연구한 자료를 토대로 자신에게 보낸 논문과 편지에 담긴 학설이 진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자 다윈은 1858년 월리스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1859년이 되어서야 종의 기원을 출판하게 됩니다.

 

월리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뺏겼다고 생각할 만도 하지만, 오히려 다윈과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표현했었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다윈과의 교류를 통해 다윈의 학설이 더 완성도 있고 설득력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진화론을 연구하는 동반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월리스는 늘그막에는 심령과학적인 면에 빠져들어서 심령학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기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월리스 역시 동남아에서 여러 생물 연구 및 체계 조사 같은 면이나 다른 생물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이런 진화론에 대하여 영국은 물론 전유럽에서 찬반이 오고 갔으며, 하지만 진화론에 대하여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세계에서 여럿 있었으며 진화론이 나오자 공식적으로 지지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영국을 라이벌 삼던 프랑스에선 오랫동안 묻혔던 용불용설을 다시 발굴해 내 이 주장을 한 라마르크의 유일한 혈육인 작은 딸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이것을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우린 다윈보다 50년은 앞서 진화론 비슷한 주장을 한 이가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윈에게 진화론에 대한 강의에 대한 초청이 많았으나 수줍음이 많고, 사람들이 나가는 자리를 꺼린 그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윈이 진화론을 정립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로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신 진화론의 열광적인 지지자인 토머스 헉슬리(1825~1895)[32]나 조지프 후커(1817~1911) 같은 후배들이 대신 나서서 이런 논쟁에서 격렬하게 맞섰습니다.

이후 인간의 진화와 성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를 출간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종의 기원에서도 인간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이 암시되었고 성 선택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이 창조가 아닌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이 명백하고도 상세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진화론 하나로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으며, 2015년에 공개된 비밀편지의 내용을 보면 성서도 예수도 믿지 않는다며 종교적 소신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편지가 공개되기 전의 관련 기록에서는 다윈이 종교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퍼뜨린 '다윈이 죽기 직전 회개하고 진화론을 부정하였다'는 루머가 버젓이 돌아다녔다고 하지만, 공개된 편지에서 다윈은 성서를 부인하고,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밝히게 돼 유감이라고 명확히 적어놓았습니다.

 

1835년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할 당시 갈라파고스땅거북이 세 마리를 영국으로 가져왔었는데, 이 거북이 중 한 마리인 "헤리엇"은 무려 2006년까지, 175년 동안 생존했습니다. 진짜 거북이는 장수의 동물임은 틀림없는 듯합니다.

 

이상은 종의 기원을 출간한 생물학자 촬스다윈에 관한 내용이었으며,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추천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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