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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에서 독립운동가로, 김향화의 숨겨진 이야기

기생에서 독립운동가로, 김향화의 숨겨진 이야기
기생에서 독립운동가로, 김향화의 숨겨진 이야기

조선시대 기생들은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기생은 주로 음악, 춤, 시가 등 예술적 재능을 가진 여성들로, 주로 양반층의 남성들과의 사교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기생은 조선의 신분제 안에서 천민에 속했으며 기생은 관노청 아래 교방청 혹은 기생청에 소속된 관노비로서, 국가행사나 지방관아의 행사에 예술과 재능을 보여주는 예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교방청에서는 기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기관을 따로 두어, 여러 해 동안 철저하게 가무악을 가르쳤고 게다가 예의범절이나 시서화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도 받아서 기생 스스로도 스스로의 품격을 높여갔습니다 한양에서 벌어지는 큰 행사를 위하여 지방의 관기들까지 동원되는 일도 많았으며 지방의 관기로서 한양에 공연목적으로 올라오는 이들을 특별히 선상기(選上妓)라고 불렀습니다 기생들의 일반관리는 호방(戶房)에서 하였고, 급여나 수당 등은 예방(禮房)에서 관리하였습니다

교방(敎坊)에는 가무악 등 공연을 담당하는 기생 외에도, 기생들이 가무를 펼칠 때 동반하는 악기 연주자들인 악공도 소속되어 있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고, 1897년부터 궁중과 지방 관아에 속해 있던 관기들이 갑자기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기생들은 자생적으로 ‘기생조합’을 구성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총독부에서는 기생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기생단속령’을 제정하여 기생들을 통제하였습니다

기생들은 기생조합에서 관리되다가 권번(券番)으로 이양되었으며 권번에 속해야 기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권번에서는 기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양성소를 두었을 뿐 아니라, 기생들의 공연활동과 요정활동을 지휘 감독했다고 합니다 권번은 철저하게 일본의 예인(게이샤[芸者])을 양성하고 관리하는 기관이었는데, 이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기생 양성 및 관리기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권번 입학은 8살부터 20살 여성으로 제한됐고, 시와 노래, 가무(歌舞), 악기연주, 예의(禮儀)를 교육받고, 졸업시험에 통과해야만 기예증(技藝證)을 발급받아 기생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는 기생 이미지를 식민지 조선여성의 상징으로 이용하였고 기생을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성적 대상물로 각인 시켜갔습니다 기생의 이미지는 사진엽서와 사진첩등 각종 인쇄물로 제작되어 조선의 문화상품 또는 성 상품으로 팔려 나갔는데, 『조선미인보감』의 출간 배경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조선미인보감』의 내용 가운데 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책자 속에 일제강점기 조선의 내로라하는 기생 611명의 프로필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원 기생 김향화를 주목해 봅니다 윗부분에는 원적(原籍), 현주소, 이름, 나이, 사진, 기예(技藝)를 나타내고 있고, 아랫부분에는 한문으로 된 가곡창과, 한글로 된 창가로 해당 기생을 율격을 붙여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수원군 수원조합에 소속된 22세 기녀 ‘金김杏향花화’에 대한 얼굴 사진과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본명은 ‘김행화(金杏花)’이면서, 김향화로 읽고 부르는 게 편해서 이렇게 같은 사람을 두 이름으로 쓰고 부르고 있습니다 행화(杏花)는 은행꽃이며 공자가 설법하던 은행나무 강단인 행단(杏檀)과 연결되어, 지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예명의 기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경성 출신으로 수원기생조합 소속입니다

춤으로는 검무 승무 정재무를 장기로 삼고, 노래로는 가사와 시조, 잡가·서도소리, 그리고 양금 연주를 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김향화를 소개하는 페이지의 아랫단에서는 오른편에는 한문 가곡(歌曲) 스타일로, 왼쪽은 언문 창가(唱歌) 스타일로 그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언문 노래를 보면, 향화가 본디 경성에서 성장했고, 열다섯에 기생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성질이 순한 김향화를 수원기생조합에 와서 만나보자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가자가자 구경가자 수원산천 구경가자. 수원이라 하는 곳도 풍류기관 설립하여 기생조합 이름 좋네.

일로부터 김행화도 그곳 꽃이 되았세라.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우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 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둥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 아주 구체적으로 김향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가무악에 능하며, 갸름한 얼굴에는 주근깨가 있다고 말합니다

목소리는 탁성이지만 애원성으로 슬픈 소리를 잘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향화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소중한 인물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원권번 소속 기생 김향화는 본명이 김순이 입니다

그녀는 1897년 경성에서 아버지 김인영, 어머니 홍금봉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수원군 북수리 48번지에 사는 정도성에게 재취로 들어가 시집살이를 심하게 했다고 합니다 남편과 갈등을 겪다가 18살에 이혼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원 권번 기생이 되었습니다

기예가 특출 나고 맵시가 좋은 김향화는 그래서 『조선미인보감』에 수원조합의 대표기생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녀로서의 삶을 살던 김향화에게 운명은 다른 길을 알려주게 됩니다

김향화가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19년 1월 21일, 고종임금의 승하 소식이 전해져 옵니다

전국적으로 조문행렬이 이어졌고 김향화도 수원조합 기생들을 이끌고, 대한문 앞으로 와서 소복 차림으로 망곡례(望哭禮)를 했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3·1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삼일운동비사를 살펴보면 수원조합 기생들이 자혜의원과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는 관련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 기생 33명은 1919년 3월 29일,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의원으로 가던 중 수원 종로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기습적으로 벌였습니다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김향화는 2개월간 고문을 받다가,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으로 넘겨져 공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 27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릅니다 이 사건을 그 날짜 매일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원 기생 김향화는 태극기를 들고 여러 기생을 데리고 경찰서 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후 경찰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졌다.

북촌검사의 심리를 받고 지난달 이십칠일 공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팔 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김향화에게 징역 6개월 형을 언도하였는데 방청석에 사람이 가득하였더라.”

1919년, 전국적으로 울려 퍼진 3.1 운동의 함성. 그녀도 그 울림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기생으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조선 독립을 외치는 함성에 동참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3.1 운동이 시작되자, 그녀는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기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생들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3월 5일, 경성의 기생들은 남대문 정거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김향화는 그 선두에서 가장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고, 많은 이들이 그 함성에 동참했습니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죄로 그녀는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녀를 심하게 고문했습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살던 그녀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내 몸을 짓밟아도,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온다!"

그녀는 일본 경찰에게 굴하지 않았고, 끝까지 조선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결국 그녀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출소 후 그녀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정확한 행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조선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조선이 해방된 후, 그녀의 이름은 점점 잊혀졌습니다.

구한말 기생들의 독립운동
구한말 기생들의 독립운동

하지만 그녀가 외쳤던 그 만세 소리는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기생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했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1919년 10월 27일에 가출옥되어 수원으로 돌아왔으며, 서울로 옮겨 살다가 1950년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매장된 장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후손 역시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수원시는 이동근 학예사가 연구해 발굴한 수원기생의 만세운동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국가보훈처에 김향화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고, 정부는 2009년 김향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습니다 김향화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독립운동에 활용했습니다. 그녀의 공연장은 독립운동가들의 은밀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녀의 정보수집 능력이었습니다. 일본군 장성들의 신임을 얻어 군사기밀을 입수했고, 이를 독립군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녀의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안전가옥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체포되기 직전, 그녀는 동료 기생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생이기 전에 조선의 딸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고문을 받는 동안에도 그녀는 한 명의 동료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녀의 강인한 정신력에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많은 기생들이 몰래 찾아와 조문했습니다. 그들은 김향화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그녀의 제자들은 스승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쉽지 않았습니다.

2010년 독립유공자 선정 이후, 평양 기생학교 터에는 작은 표지석이 세워졌습니다. "이곳에서 김향화 열사가 독립의 꿈을 키웠다"는 내용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현재 교과서에도 실려있습니다.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김향화를 통해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김향화 실제 모습
김향화 실제 모습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1920년 8월, 그녀는 일본 경찰에 체포 당시 그녀는 독립군 연락책으로부터 받은 문서를 먹어버렸다고 합니다.

취조실에서 그녀는 매일 고문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 경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딸로 태어나 이렇게 죽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감옥에서 그녀는 작은 쪽지에 마지막 시를 남겼습니다.

"꽃잎처럼 스러지는 이 목숨이

나라 위해 바칠 수 있어 기쁘도다

후세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선의 딸이 되리라"

그녀의 옥중 생활은 45일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동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현재 국립현충원에는 그녀의 상징적인 묘가 있습니다. 비록 유해는 없지만, 그곳에는 매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헌화를 합니다.

김향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녀의 숭고한 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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