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광복 후 일본인들은 왜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을까?

 

광복 후 일본인

 

1945년의 기록 조선의 해방과 일본인들의 몰락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세상이 바뀌었다고 체감한 것은 해방 이튿날부터였습니다.

한 일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1945년 8월 16일 남대문로에는 붉은기를 든 조선인 무리가 만세를 외치며 서울역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련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에 환영행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죠. 소문은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조선인들이 일본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1주일간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각종 사건은 913건 조선총독부에는 조선인들이 경찰서 지방행정기관 신사를 습격했다는 보고가 속속 올라왔습니다.

경찰관과 교원이나 관청 공무원이 주로 공격을 당하곤 했습니다. 당황한 총독부는 8월 18일 각 기관에 걸어둔 일왕의 사진과 지역 신사의 위패를 불태우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8월 19일 총독부는 군대를 동원해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미군정이 들어선 9월부터는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실감하게 됩니다.

미군정은 9월 9일부터는 일장기 게양 금지 9월 23일에서 29일까지 일본인의 무기 회수 10월 8일부터는 일본인 이동제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해방 직후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낀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은행입니다.

서울 충무로 경성우편국에서 일한 이노우에 스미코는 “예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고 회고했습니다.

지급준비금을 위협할 정도의 거액이 계속 빠져나가자 총독부는 17일 예금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뺄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지만 총독 가족마저 재산을 챙겨 황급히 넘어가는 상황에서 별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습니다.

12월엔 일본 유력자들이 주식 채권 보험증서등을 자전거 바퀴 튜브에 숨겨서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해안 경찰에 붙잡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때 잡힌 사람 중엔 ‘조선의 수산왕 부산의 3대 부자로 알려진 가시이 겐타로도있었습니다. 그런 인사도 밀항선에 몸을 맡겨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죠. 일본인이 재산을 몰래 빼돌리는 데 혈안이 된 건 미군정에서 재산 반출을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은 본토로 돌아가는 일본인이 1000엔 이상의 현금을 가질 수 없도록 했습니다. 소지품도 휴대가 가능한 보따리로 제한했죠. 그래서 일본인들은 부동산을 팔고 귀금속이나 비싼 문화재로 바꿔가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경남 일대 바닷가엔 밀항선이 특수를 누렸습니다.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항구 주변엔 ‘오사카 행’ ‘후쿠오카 행’이라고 적힌 깃발을 내건 임시사무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대한해협에는 이들을 노리는 해적이 기승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한 달 가량된 1945년 9월 12일 서울 소공동 YMCA 청년회관에는 일본인 학생 부인 노인등 남녀노소가 가득 모였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조선어 학습이었습니다. 이날 가사야 야스타로 경성 YMCA 총주사는 “조국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으로 발생한 현 상황은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그저 망연자실하여 불안과 후회로 가득 찬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조선어를 배워 신조선에 새로이 협력해야 한다”고 조선어를 배우러 온 일본인들을 격려했습니다.

조선어 강좌는 이날부터 3개월 과정으로 매주 3번, 오후 4시부터 90분간 진행됐다고 합니다. 패전 후 처지가 180도 바뀐 일본인들의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나지요.

또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고자 한 일본인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충남 강경의 경찰서에서 근무한 나카무라 기미는 “(일본이)패전했다고 꼭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느냐”고 말했고 그는 왜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회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조선의 일본인 사회는 귀환파와 잔류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이발소 목욕탕 음식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성제대 교원 양성소에 다니던 도코 요시마사도 가족이 사는 평북 정주로 돌아와 평일엔 조선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주말엔 공중목욕탕에서 일했습니다.

또 학교에서 해직된 일본인 교사는 얼마 전까지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북한 지역에선 소련군을 상대하는 접객 여성이 나타났는데 새하얀 분과 붉은 입술을 한 이들을 로스케 마담이라고 불렀습니다.

“암시장은 성황을 이뤘다. 일본인에게 약탈한 물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사과 감 털게 조선 엿 육류 등이 쌓여있지만 옷에 예쁜 장식을 한 소련 장교 부인과 조선인 부인 사이로 그야말로 상거지나 다름없는 몸뻬 차림의 일본 부인이 대두나 콩을 가꾸어가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일왕의 항복 방송 후 전시물자로 비축한 것들이 한꺼번에 시중에 풀리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도 옷감, 가죽제품, 구두, 쌀등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38도선 이남의 미군정은 본국으로 되돌아갈 일본인의 순서를 정했습니다.

그것은 ①일본군과 가족 ②일본 경찰 ③신관, 일본인 노동자, 일반 민간인 ④고위 공직자와 회사 간부 ⑤교통 통신요원등의 순서였습니다.

조선인이 싫어하고, 미군에게도 위험한 군인과 경찰을 가장 먼저 보내기로 한 것이죠.

이것은 군인, 경찰을 끝까지 조선 땅에 남겨두고 일본인들을 지키려던 총독부의 구상과는 반대였습니다.

한편 당시 공업이 발달한 북한 지역은 38선 이남보다 상황이 복잡했습니다.

소련군은 미군보다 일본인들을 폭력적으로 다뤘기 때문에 일본인 사회가 더 크게 요동쳤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고급 기술을 가진 일본인 기술자들이 빠져나가면서 큰 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한편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본토인들로부터 차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부분 빈털터리 신세로 오다 보니 일본 친척에게 얹혀살았는데 이로 인한 갈등이 곳곳에서 벌어졌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 이들은 일본에서 하류층으로 전락했고 전염병등 각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이들 때문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돼 한국에서 온 일본인이 자살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8ㆍ15 광복의 기쁨 속에서 조선에 남은 일본인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또 본국에 돌아간 뒤에는 많은 차별로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조선인들의 상황이기도 했죠. 많은 일본인이 이때서야 비로소 침략과 전쟁이 나쁜 것이라는 자각을 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몇몇 정치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 여론이 높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으로 지난 세기엔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가 피해를 당하였고 그 상처는 아직 온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사실 일본은 훨씬 더 일찍 항복하려고 했지만 연합군과의 협상이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일본이 조선과 대만 같은 해외 영토와 점령지를 종전 후에도 유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이 주장한 해외 영토는 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이 인정한 일본의 영토들이었습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남태평양의 넓은 남양군도 섬들을 모두 점령했고 한반도 조선, 대만, 그리고 사할린이 이에 포함되었습니다. 일본은 이 지역들을 자국 영토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연합군은 '이미 카이로 선언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약속했고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한 모든 지역을 해방시키기로 했다. 니들은 항복하는 주제에 뭔 말이 많노'라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항복 협상이 맞지 않아 일본은 쉽게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았고 여차하면 수도 도쿄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질 위험이 커져 국민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일본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해외 영토와 점령지를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국제법적 의무를 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패전국에 지나치게 가혹한 배상금을 부과하면 또 다른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서는 '배상금을 물리지 말고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자'는 결정이 내려졌고 대신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들을 석기시대 수준으로 돌리려 했습니다. 한반도에서 귀환하는 일본인은 최소 100만 명에 이릅니다. 그 중 민간인은 72만 명이며 이 중 북한에서 귀환한 민간인들에는 만주에서 살던 일본인들도 포함됩니다. 이들은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일본 남자들이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고 여성들은 성폭행당하는등의 상황을 겪은 후 탈출하여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탈출해온 사람들입니다.

이때부터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적인 인구 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할린, 만주, 중국, 조선, 대만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등지에 있던 일본인 660만 명이 대거 본토로 돌아오게 됩니다.

660만 명이 귀환하려면 얼마나 많은 배가 필요했을까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패전 당시 남아 있던 일본 해군의 함선 관부 연락선과 같은 민간 선박 그리고 미군의 수송선 100척 상륙함 85척, 병원선 6척이 일본군과 민간인 철수 작전에 투입되어 이들을 실어나릅니다.

결국 총 346척의 선박이 약 66만명의 귀환자를 수송했다고 합니다. 총 귀환 대상자중 약 10분의 1이 귀환선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이렇게 1945년 8월 15일부터 1949년 말까지 총 624만 명의 일본군과 민간인이 일본으로 귀환했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조선에는 일본 민간인 72만 명과 일본군 36만 명이 체류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 중도에 굶어 죽거나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3만 5천 명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만주나 조선이민자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전후 일본 사회의 강력한 '평화주의'와 '평화 교육'과 결합하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만주나 조선 출신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만주 침략의 실동 부대', '빈농의 2, 3남 등 내지에서 실패한 망나니'라는 이미지로 배척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조선 해방은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식민지배와 지배자의 변화가 얼마나 극명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잘 드러냅니다.

이는 단순한 승리와 패배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복잡한 인간 군상과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