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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공학적인 슈즈 구조와 눈을 즐겁게 하는 디자인적 감각으로 유명 배우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스타들을 위한 구두장이"

오늘은 이탈리아의 구두명장 살바토레 페라가모에 관한 내용입니다.

https://www.ferragamo.com/shop/kor/ko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1898년 6월 5일 이탈리아 남부 보니토에서 가난한 가정의 열한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안토니오 페라가모와 마리안토니아 페라가모였으며, 그들은 모두 같은 성을 가졌습니다.

이는 작은 이탈리아 마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살바토레 페르가모는 1940년에 완다 밀레티와 결혼했으며, 완다 밀레티는 보니토의 의사이자 주지사였던 아버지의 딸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네 명은 딸,두 명은 아들입니다.

-피오라나 페르가모 (Fiamma Ferragamo, 1941-1998):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장녀이자 후계자. 신발 디자이너로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습니다.

-지안카를라 페르가모 (Giancarla Ferragamo, 1943-):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차녀. 회사의 부회장

-테라우치오 페라가모 (Ferruccio Ferragamo, 1945-):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장남. 회사의 회장

-마시모 페르가모 (Massimo Ferragamo, 1958-):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차남. 회사의 미국 지사장

-레오나르다 페르가모 (Leonarda Ferragamo, 1953-):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삼녀. 회사의 이사

-폴리나 페르가모 (Fulvia Ferragamo, 1950-2018):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사녀. 회사의 액세서리 부문 이사

살바토레 페르가모: 신발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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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생과 공적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1898년 6월 5일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의 보니토에서 가난한 가정의 열한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홉 살 때 자신과 자매들을 위해 첫 번째 신발을 만들었고, 그때부터 신발 제작자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백정이라는 신분처럼, 당시의 이탈리아에서도 신발 만드든 사람들은 천대를 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어린 페라가모가 11살 때부터 동네 구두장이 아저씨한테 자주 놀러 가 구두 만드는 것을 보며 흥미를 갖았고, 처음에는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결국은 페라가모의 뜻을 받아들여 이 동네 구두장이 아저씨의 구두 만드는 보조로 들어가게 됩니다.

본인의 적성에도 잘 맞았고, 남다른 손재주가 있었던 페라가모는 일찌감치 구두만드는 기술을 습득하며,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런 재능을 일찌감치 눈여겨보던 미국에 건너가 살고 있던 형의 권유로, 신발 제작을 배우기 위해 나폴리로 갔다가, 1915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보스턴에서 형제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곧 캘리포니아로 이동하여 할리우드 부트 샵을 열고, 영화 스타들과 영화 제작사들을 위해 신발을 디자인하고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발이 아름답기만 하지 않고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해부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1927년,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미국에서 성공한 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피렌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설립하고, 신발 공장을 열었습니다.

그는 쿠치 베하르의 마하라니, 에바 페론, 메릴린 먼로 등 유명한 여성들을 위해 신발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강아지 가죽, 악어가죽, 물고기 가죽 등 다양한 재료를 실험하고, 역사적인 영감을 받아 신발을 디자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특허를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1933년에 경영상의 문제와 경제적인 압력으로 파산하기도 했지만, 1950년대에는 하루에 350켤레의 신발을 수제로 만드는 700명의 장인들을 고용하며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1938년에는 코르크 웨지 힐을 발명하고,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인 주디 갈란드를 위해 무지개 색상으로 디자인한 '더 레인보우’라는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이 신발은 현대 서양에서 플랫폼 신발이 재창조된 최초의 사례로, 갈란드의 대표곡 '오버 더 레인보우’와 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헌사였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희귀한 재료들을 찾기 위해 새로운 재료들을 실험하기도 했습니다.

 

2. 신발의 특징과 특허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신발 제작자로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신발의 외형뿐만 아니라 기능과 구조에도 주목했습니다. 그는 발의 구조와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발등의 곡선을 지탱하는 강철 샹크를 신발 안에 삽입하여 발에 편안함을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발의 모양과 크기에 맞게 신발을 제작하기 위해 3D 발 모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발 제작에 사용되는 재료와 형태를 다양화하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인 영감을 받아 신발을 디자인했습니다. 그는 코르크, 나일론, 비닐, 비스코스, 유리, 나무, 꽃잎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또한 웨지 힐, 케이지 힐, 스틸레토 힐 등 혁신적인 형태의 신발을 발명하고, 그리스, 로마, 중국, 이집트 등 다양한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신발을 디자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호하고 인정받기 위해 여러 특허를 신청하고 취득했습니다. 그는 1929년부터 1960년까지 350여 개의 특허를 얻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특허는 다음과 같습니다.

1938년: 코르크 웨지 힐 (Patent number: US2134135 A) 5

1947년: 케이지 힐 (Patent number: US2471608 A) 5

1950년: 스틸레토 힐 (Patent number: US2546076 A) 5

1956년: 금속섬유로 강화된 나일론 실로 만든 신발 (Patent number: US2792287 A) 5

1959년: 발등의 곡선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 버클 (Patent number: US2917241 A) 5

3. 주요 제품

로퍼나 하이힐 같은 구두가 유명합니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최고급 가죽만을 엄선하여 장인의 손길을 통해 전문적으로 다루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신었을 때 발을 편하게 감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슈즈의 안창에 "섕크"라는 철 지지대를 삽입하는 독자적인 기술을 통해 인체공학적인 방법으로 설계된 페라가모 슈즈는 신을수록 편안한 착용감을 자랑합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해당 기술에 대한 특허권까지 취득한 바 있습니다.

페라가모를 대표하는 아이코닉 슈즈 "바라" 슈즈는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월드 와이드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판매된 슈즈 중 하나라고 합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창의적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첫째 딸 피암마 페라가모 (Fiamma Ferragamo)가 개발하였습니다.

원래는 금장 버클에 가죽 리본의 조합으로 제작하길 원했으나, 재단사의 실수로 인해 금장 버클에 그로스-그레인 리본이 조합된 "바라 리본 (VARA Bow)"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바라 슈즈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재탄생되며 꾸준히 페라가모의 아이코닉 슈즈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를 잇는 새로운 아이코닉 슈즈 "비바 (VIVA)" 슈즈가 올해 처음 출시되었습니다.

페라가모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자 하드웨어 간치니(Gancini)는 슈즈, 벨트, 가방을 비롯한 페라가모 제품 전반에 걸쳐 모든 것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피렌체에 위치한 페라가모 본사 팔라초 스피니 페로니(Palazzo Spini Feroni)의 출입문 문고리 모양(손으로 만든 철제 훅 모양)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고 합니다.

남성 신사화는 네 가지 라인이 출시되며 그중 가장 프리미엄 라인인 트라메짜 (Tramezza) 라인이 유명합니다.

고급 구두에 사용되는 굿이어 웰트 제법으로 가죽 웰트와 밑창을 사용했거나 가죽 중창과 밑창을 이용한 블레이크 래피드 제법이 주로 사용되는 하이엔드 기성화 라인이다. 프리미엄 라인인 만큼 간혹 직접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메이드 투 오더 (Made to Order) 서비스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가죽을 잘 다루는 브랜드로 유명한 만큼 지갑이나 가방의 만듦새가 상당히 뛰어난 편이며, 프라다나 구찌, 디올 등의 60만 원대가 넘는 지갑이 네임밸류와 가격에 비해 바느질이나 소재 품질에 종종 혹평이 나오는 것과 달리, 페라가모 제품이 품질이 떨어진다는 평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만큼 제품의 품질은 최고로 꼽힙니다.

가방의 경우 지퍼부터 로고, 스티치, 코팅, 안감까지 이름값 하는 짜임새를 자랑하며, 상당수 명품 브랜드들이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면서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지만, 꾸준히 모든 제품을 이탈리아만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지갑, 벨트의 경우 고급스러우면서도 절제된 디자인으로, 남성들에게 줄 선물로 많이 추천된다. 페라가모를 대표하는 간치니 로고를 활용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중년 이상 사용자의 나이대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고급진 느낌을 주기 때문인 듯합니다.

국내에서는 90년대 고위층 여성들이 명품 의상을 대가로 청탁을 주고받았던 옷 로비 사건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현재는 샤넬, 루이 뷔통, 에르메스, 프라다, 구찌, 디올 등 여러 상위급 명품 브랜드에 밀리며 인기가 다소 꺾였고 위상도 예전만 못하지만 단정한 이미지를 필두로 한 시대를 풍미한 원조 청담동 며느리룩 브랜드로, 그 패션의 필수 아이템이었던 페라가모의 바라 슈즈와 머리띠는 짝퉁도 불티나게 팔렸을 만큼 인기를 누렸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4부의 히가시카타 죠스케가 사고 싶어 한 구두 브랜드이기도 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아카이브 슈즈는 당대 최고 톱스타들이 사랑했던 슈즈였던 것으로 이미 유명세가 나있습니다.

카프스킨 백이 100만 원 중반대부터 시작하며, 세일시즌에는 더 저렴한 가격에 구매가 가능합니다. 한 철 유행하고 없어져버리는 디자인보다는 스테디하고 타임리스하고 고상한 디자인이 특징으로, '하나 사면 10년은 무난하게 들 수 있는 가방'이 나오는 브랜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4. 가족경영

완다 밀레티(페라가모의 부인)는 1921년 12월 18일 이탈리아 남부 보니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보니토의 의사이자 주지사였고, 페라가모 가족의 의사이자 고객이기도 했습니다.

완다는 18살이었을 때, 1938년 여름에 살바토레 페라가모와 처음 만났습니다. 살바토레는 그녀보다 20살이나 많았고, 보니토에 자선 활동을 하러 왔습니다. 완다는 그를 집에 초대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살바토레는 완다를 보자마자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두 해 후인 1940년 11월 9일에 나폴리의 산타 루치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 후에 그들은 피렌체 근처의 피에솔레에 있는 빌라로 이사했습니다. 그들은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완다는 남편의 사업에도 도움을 주었고, 신발 디자인에 의견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1960년(66세)에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완다는 39살이었고, 여섯 명의 자녀를 혼자 양육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아 회사의 대표이사가 되었고, 자신의 장녀 피오라나를 신발 디자인 부문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다른 자녀들에게도 회사의 각 부문을 맡겼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비전과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회사를 현대화하고 국제화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완다는 남편과 함께 보낸 시간을 항상 기억하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작품과 유산을 보존하고 홍보하기 위해 살바토레 페르가모 박물관과 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패션과 예술에 관심이 있는 젊은 사람들을 위해 장학금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였습니다.

완다는 2018년 10월 18일에 96세의 나이로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사랑하는 여성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후계자였습니다. 그녀는 또한 패션의 아이콘이자, 가족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만든 살바토레 페르가모 브랜드를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페라가모의 생전에는 부인 완다는 6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현모양처였습니다. 경영, 사업등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막상 페라가모가 일찍 사망하고 그의 바톤을 이어받아 사세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계기는  평소에 페라가모와의 금술도 좋았고, 회사 내의 얘기를 가장 많이 나눈 대상이기도 하여, 그만큼 페라가모회사에 대해서 속속들이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현재의 페라가모는 완다 페라가모라는 말도 있습니다.

페라가모 사후, 기존의 직원들과 함께 또한 페라가모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큰딸(디자이너)을 영입하면서 안정을 찾고, 사세를 키우게 됩니다.

이 회사도 중국이나 동남아등에 외주를 주지 않고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이탈리아에서만 만들고 있습니다.

가족경영으로, 별문제 없이 잘 키워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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